'이리 오세요.'
할머니가 뒤돌아보며 손짓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할아버지는 장의자 두어 개 뒤편에 앉아 눈길을 앞에 둔 채 강퍅한 표정으로 대꾸가 없다. 차임벨이 울리며 다른 대기자가 담당에게 다가간다.
'이번에는 당신 차례에요.'
채근하는 할머니. 아무래도 자기 양반이 못 미덥다. 한 소리 들을지라도 기어이 할 말을 늘어놓는다.
'아, 순서에 따라 빨리 하려면 여기 와 있어야지요.'
'알아서 갈 테니 가만히 있어!'
할아버지가 역정을 냈다.
'그래도....'
사오십 년쯤 같이 살아왔을까. 말 한 마디 따뜻하게 건낼 줄 모르는 할아버지가 야속하다. 그러고서도 언필칭 잘났다고 사람들 앞이고 어디서고 간에 가리지 않고 소리 치기는.
건강검진 때문에 병원에 갔다. 예약을 하자 정한 시각에 와야 한다고 수차 확인메시지를 날리더니, 거기서야말로 지체되어 허비하는 시간이 적지 않다. 일과를 미루고 달려와도 개인 사정은 안중에 없다. 채혈실에서 번호표를 뽑고 순번을 기다렸다. 어르신네 중 누군가 큰소리를 낸다. 귀가 어두운 데다 당신 뜻대로 할 수 없어 못마땅하다. 아마 평소 어투마저 그러한 듯했다. 말귀마저 없어 채혈담당이 몇 번이나 되풀이해 설명한다. 검진이라지만 병원이 부담스럽다. 이마저 왁자지껄한 행태를 보노라니 혼란스럽다.
회사 앞 세탁소에서 바지 두 벌을 만팔천 원에 수선했다. 면바지를 하나 장만해 두었는데 통이 넓어 헐렁했다. 이를 고치고, 양복바지 하단이 해져 너덜너덜한 걸 누벼달라고 했다. 또, 구두 튿어진 곳을 깁고 바닥 밑창을 바꾸는데 이만팔천원이 들었다. 생각난 김에 남대문에 나가 잃어버린 렌즈 캡도 구했다. 별 것 아닌데도 이것저것 해치우고나자 체증이 내리듯 후련하고 뿌듯하기까지 하다. 이참에 덜덜거리는 자동차도 손을 볼까. 아침에는 세면하다말고 욕실 바닥을 솔로 문질렀다. 손을 부지런히 놀릴수록 타일 사이 꾀죄죄한 때가 벗겨졌다. 시간만 있다면 여기저기 문질러 말끔하게 해 놓으련만.
버리고 새로 장만하는 것에 익숙치 않다. 물건에 연혁을 새기고 의미라도 다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인제 주인 따라 낡고 고물이 된 구닥다리들. 흠이 나고 삐걱이는 게 가득하다. 살면서 어찌 온전한 것만 갖고 갈 수 있을까만, 거창한 바깥 세상에 시선을 두고 있을 땐 몰랐는데 뒤돌아보자 거슬리는 것 투성이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떨어져 못쓰는 것을 뒤늦게 추려내고, 소용되는 것은 제때 고쳐 쓸모 있게 해 놓아야겠다고 느낀다. 다른 예이지만, 자동차 부품을 갈듯 몸의 장기도 바꿔 끼워 앞으로 백오십 살을 사는 것도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까지 살 것까지야 없지만, 가만.
이 가을을 살뜰하게 보내고, 새로 봄날을 맞으려면 지워야 할 고루한 습관이나 생각 목록이라도 작성해야 하지 않을까.
Ernesto Cortazar, Emmanuelle's The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