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봄날 변주곡

*garden 2014. 3. 7. 10:12




이른 아침 냉기에 종종걸음치는 사람들. 꽃샘추위라지, 매운 맞바람으로 눈물을 글썽거리자 같이 가던 일행이 웃었다.
'마치 첫사랑 같은 바람입니다.'
봄이 오는 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슬픈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나도 웃었다. 첫사랑이었을까. 아련한 시절을 더듬자 떠오르는 사람들. 그걸 사랑이라 해도 될런지. 한때 인연으로 스친 이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던가. 달콤하기보다 쌉싸름한 아픔이어서 억지로 지우려고 하지 않았던가.


갸름하여 모딜리아니의 여인 잔느 에뷔테른느를 닮았던 그녀는 내게 다가오며 아예 군에 가있는 자기 남자 친구를 거론했다. 순진한 나는 이를 떫떠름하게 받아들여 그녀 손이 내 손에 슬쩍 닿기만 해도 화들짝 놀랐다. 은연중 두터운 벽을 치고 있는 나와 달리 친구들과 있는 자리에서도 그녀는 당당히 내 옆자리를 꿰차곤 했는데, 그게 일면 놀리는 듯 여겨진다. 당연히 그녀가 가까이 오면 눈치채지 않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이 땅의 남자라면 당연히 국방의 의무를 진다. 나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입대를 했다. 군대란 게 일면 사막이다. 눈을 뜨면 막막한 현실에 위안거리만 간절하다. 생각을 굴리다보면 떠올리는 얼굴이 그녀밖에 없다. '뜻이 있으면 열린다'는 말처럼 둘쨋번인가의 휴가때 버스 안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친구를 통해 시골 중학교에 발령 받아 근무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이어도 틀림없다. 이름을 부를까, 아는 체 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두리번거리던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엉거주춤 일어설 참인데 상대는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군복을 입은 낯선 내 모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입대한데 따른 억하심정이었을까. 막 버스에 올라 몸을 가누던 그녀가 다음 정거장에 닿자 냉큼 내려버린다. 이건 또 무슨? 늘 당황스럽게 만드는 여자의 도무지 알 수 없는 심사라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황망한 내가 부끄럽다. 뻔질나게 다가들던 그녀의 몸짓이나 손짓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러구러 전역한 다음 첫 직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만만치 않다. 우선 사람을 대하는 일이 부담스럽고,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 어렵다. 일일이 지시를 받아야 하고, 누군가의 뒤치닥거리를 위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분주해야 하는 내게 부아가 치민다.
그런 나를 위로해 주던 동료들 가운데 여자 아이 하나가 부쩍 챙겨준다.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이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 준다는 게 싫지는 않다. 성에 차고말고를 가릴 계제도 아니어서는. 사랑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 한 사람을 책임지고 돌봐야 하는 나이일까 싶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러자니 하고 있는 일이 영 마뜩치 않다. 마침 서울에 있던 선배 연락을 받았다. 실은 나서 자란 텁텁한 도시에서 마냥 버텨야 하는 상황이 싫었는지도 모른다. 옳커니 싶어 무작정 올라간 참에 몇 가지 시험을 치뤘다. 그게 통과되어 주저앉아 버린 게 바로 천직이 되고 말았다.
자리를 잡고 보니 눈코 뜰 새가 없다. 야근은 당연지사이고, 휴일에도 출근하기 일쑤였다. 몇 개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휙 지나버린 어느 저녁답에야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멀리 있는 그녀를 떠올렸다. 내게 보여주던 그녀 진심이 떠올랐다. 늘 굳어 있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부터라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사랑인지 모호하지만 떨어져 있던 시간을 생각하자 눈물겹다. 만나서 따뜻한 약속이라도 해야지. 마음을 가다듬자 한시도 참을 수 없다. 냉기가 지워지며 바람이 온화한 계절이다. 스스로의 뺨을 쓰다듬었다. 공중전화기로 쫓아가 다이얼을 돌렸다.
'그대로구나. 아냐, 더욱 예뻐진 것도 같고. 오랜만에 전화를 해서 깜짝 놀랐지?'
서먹함을 지우려고 수다를 떤다. 환하게 맞아주는 상대가 고마워서 하마트면 여린 손을 꼬옥 잡을 뻔했다. 기꺼이 나와준 것도, 어색함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가상하다.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고 근황을 묻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낸다. 헌데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화제가 겉도는 듯하다. 낯선 이름으로 상대가 나를 자꾸 부르는데, 처음에는 못 들은 척 넘어갔다. 나중에 보니 이름이 입에 익어 무의식중에 쫓아나오는 것 같다.
이전 사랑하지 못한 여자와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데도 분한 마음이 겹쳐 벌떡 일어섰다. 별안간 가슴이 묵직하다. 멀리 천둥소리가 울렸다. 회오리바람이 일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친다. 돌려받은 대로 앙갚음해 줘야지. 실언을 깨달은 상대가 입을 막았지만 말 없이 돌아섰다. 이런 꼴을 당하려고 부랴부랴 쫓아왔던가. 무지한 내게 화가 나 참을 수 없다. 휘황찬란한 도시의 밤길을 마구 휘저었다. 비틀거리며 아픈 날을 허투루 방기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Yanni, Felit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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