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한때 거기

*garden 2014. 10. 27. 06:35




삶과 죽음은 본질이 다르다. 삶이 죽음이 될 수 없고, 죽음이 다시 삶으로 이어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이런 얘기를 심각하게 나누기도 멋적다. 친구가 자기 잔에 술을 덧따르더니 단숨에 마셨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건 사랑과 화투와 바둑뿐이야.'

쉬는 시간이면 흑백이 분명한 눈으로 운동장을 내려다 보는 순주. 사정없이 쫓아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여백을 어림할 것이다. 화단 사이 빽빽한 아이들을 피해 햇빛 환한 운동장 저 넓은 곳에 얼른 한 수 두고 싶은 표정이다. 중학생인 순주가 그때 바둑1급이라고 했는데, 아마추어 1급이면 명색이 최정상급이다. 수업을 마치고 둘이 바둑을 두기도 한다. 처음에는 나도 신중하다. 돌 하나로 천하를 압박하고 짓누르기. 순주도 이에 맞춰 두고. 돌이 차츰 많아지면 나는 혼란스럽다. 갈무리가 되지 않는 내 돌은 어느덧 흩뜨러지고 끊어지기 일쑤이지만 생각없이 툭 던져 놓은 듯한 순주의 돌은 속속들이 이어져 길이 되고 경계가 되며 자기 영역을 가름한 철옹성이 되곤 했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바둑을 둔 다음에도 순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순을 일일이 복기해냈다. 포석과 행마라든지 정석과 맥, 사활을 얘기하곤 했는데, 내게 바둑이란 그저 심심풀이일 뿐이어서 쇠귀에 경읽기이다.
돌이 놓이면 대응해 돌을 놓고, 돌로 삶을 잇거나 상대 명을 끊는다는 것이 수가 거듭될 때마다 경우가 달라 그야말로 천변만화이다. 바둑 고수는 대개 얼마 앞의 수까지 계산할 수 있을까. 가락동 호프집에서 만난 양상국 사범은 모호하게 답을 피해갔다. 나름대로 판단하기에 인생이나 바둑은 매한가지여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모름지기 바둑을 알게 되면, 곧 전판을 꿰뚫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단 상대의 수에 따라 나도 달리 둬야 하기에 온통 판을 꿸 필요가 없어 어느 정도까지만 머릿속에 그릴 것이다. 입바른 누군가는 사십 수 앞까지도 본다고 했다. 말이 사십 수이지, 그 경우의 수야말로 얼마가 될지 생각해보라. 혹여 판을 흩뜨린 다음에도 고수들은 복기해낸다. 그게 단순복기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두었을 경우과 저렇게 대응할 경우를 뒤섞어가며 설명하는 것을 보면 놀라울 뿐이다. 이건 암기력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대응한 수이기에 잊어버릴려고 해야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길을 떠날 적이면 필수 지참물이 된 셀카봉. 외국 저널은 자기사랑에 빠진 이들의 아니꼬운 모습이라지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온전히 자기를 찍는데 웬말이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 좋은 시절을 나중 들춰보면 어떤 기분일까. 너도나도 추억의 한때를 간직하기 위하여 이렇게도 저렇게도 표정을 바꾸며 화양연화를 찍는다. 나도 지난 시간을 복기한다. 이제 가을은 이미 지나쳐버린 가을보다 틀림없이 적을 것이므로, 어제 벼랑 위에서 맞던 허무한 바람과 오늘 감나무 아래서 떠올리는 달콤한 시간을 되새기는 게 어쩌면 슬픈 일이어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Elias Rahbani, We Don't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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