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병준이 알지?'
'응, 걔가 왜?'
'화단에서 제법 알아주는 편이더만. 뇌졸증으로 쓰러져서 인제 붓을 잡을 수 없다더라.'
자기 소질을 알아채고 본능적으로 따라간 병준이. 어느 때 집 쪽방에서 나와 반기던 홀어머니가 떠올랐다. 사회 초년 시절 볼일이 있어 대학 캠퍼스에 다니러 갔다가 만난 적 있다. 재학중이냐고 물었더니 교직원이라고 얼버무리기에 웃음으로 넘어갔는데, 알고보니 서울 유수의 미대에 다니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어쩐 일인지 중학교에 들어갈 때도 재수하고, 대학 입학때도 재수를 해서 까마득한 후배들과 다니는 바람에 자연스레 멀어졌다. 나중에야 스스로 금을 그어 그 선을 넘어오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는 것을 알았다. 동조하고 싶지 않아도 본인이 불편해 한다면 방법이 없다. 세월이 지나 세간의 입을 통하거나 뉴스에서 동정을 보았지만 어느덧 속한 세상이 달라 아는 체할 수 없게 되었다.
병준이와 미술대회에 함께 나간 적 있다. 예술계통의 학교 주최여서 진학에 가산점을 준다는 조건도 있어 은연중 알력이 심하다. 나야말로 그 가산점이란 걸 실감할 수 없어 억지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다. 단지 그러한 미술대회에 출전하는 것만으로 우쭐했다. 정해진 과제를 그리는 것이었는데, 데생한 다음 색칠을 채 반도 끝내지 못했을 때 저만큼 앉아있던 병준이가 쫓아온다. 똑같이 보고 그린 정물화에 어떻게 우열을 가릴까. 채점 방법이나 기준도 궁금하다. 몰두하는 옆에서 병준이가 긴 목을 빼 기웃거린다.
'야, 잘 그렸는데....'
'너는?'
'응, 다 됐어.'
'시간 얼마나 남았어?'
'아직 괜찮으니 천천히 해도 돼.'
여기저기서 열중하던 아이들이 걸상을 밀고 일어서는 소란스러움으로 괜히 조바심이 난다. 창으로 들어오던 빛이 아까보다 더욱 강해져 탁자 위에 올려둔 꽃이 생생해졌다. 덧칠로 매조지해 기분을 냈다. 병준이가 자기 그림을 들고 왔다. 내 그림은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여 표현했는데, 병준이 정물화에는 꽃이 훨씬 크게 그려져 있다. 병준이가 내 눈치를 본다.
'우리 그림 바꿔서 이름을 적어 낼까?'
'그러면 안될텐데....'하는 우려가 앞서지만 어차피 기대할 것도 없지 않은가. 장난기어린 눈을 보자 대번 마음이 동한다. 킬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당을 마친 악동 둘이 과제를 내고 나가 쫓아가는 길이 훤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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