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번 만나야지. 오랜만에 친구들과의 자리를 만들까 하는데, 멀지만 너도 올 수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로 들으며 열거하는 동무들 얼굴을 하나하나 그린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낯선 감도 없지 않지만 불원천리 쫓아가고픈 마음이 무럭거린다.
"그래, 별 일 없으면 가야지. 내일 살펴보고 연락을 줄게."
약속이 있어 부리나케 가던 참이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치르면서도 내내 그들을 떠올렸다. 그렇찮아도 앞뒤로 어른 기일과 명절이 있어 난처하다. 가만, 다른 일정도 몇 개 잡혀 있는 것 같은데.... 곤란하지만 하루 정도 시간이야 내지 못할까. 작정한 순간 마음이 굴뚝 같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열차표를 예매하고, 갈 참이라며 동생에게도 일러둔다.
예약된 방에 들어선 순간 안온한 조명이 내린다. 웅성거리며 옹기종기 있다가 고개 돌리는 얼굴들. 여기저기서 내미는 손을 잡자 온기가 전해진다. 아, 이래서 고향에 돌아오겠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는구나. 저절로 푸근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쓰다듬었다. 어떻게 살아왔거나 간에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니. 술을 한모금도 마시지 않는다는 녀석이 앞장서서 주문한다. 잔을 부딪치고 저녁을 먹으며 내내 도란거리는 모습. 예전 살던 곳과 기억,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체력장을 치르는데 넓이뛰기를 얼마나 기록했는지, 턱걸이와 팔굽혀펴기를 몇 번 했는지, 공 던지기 기록까지 일일이 얘기하는 녀석도 있어서 웃었다.
"저렇게 머리 좋은 녀석이니 이만큼 자랐겠지!"
"아냐, 난 그때 기억까지만 하고 성장을 멈췄어."
시끌벅적하지만 심정은 같다. 어느새 눈가 주름이 늘어 물기가 촉촉하게 어리는 것을. 그때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고 이 자리에 우뚝 서게 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지지리도 못살아 학교를 빠지겠다고 작정한 다음 몇날 며칠 밖을 떠돌던 때, 선생님이 친구를 통해 보낸 쪽지에 있는 따뜻한 글귀가 자기를 교단에 서게 만들었다는 녀석 얘기도 헛말이 아님을 안다. 십여 년 전 불현듯 몇몇 동무가 생각나 달려온 적 있다.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 서넛에게 연락했는데, 나중 와서보니 이삼십 명이나 모여 있어 놀라웠다. 그때 나온 명주는 오늘도 그야말로 오랜만에 나온 것이라고 했다. 헌데 여리고 말이 없으며 잘 웃던 명주가 아니었다. 살이 빠져 호리호리한 몸매가 문득 누군가와 닮았다.
"명주야, 어쩌면 그렇게 네 어른과 똑같아졌냐? 처음에는 깜짝 놀랐네."
간밤에 무지개의 뿌리를 찾겠다며 달려가는 꿈을 꾸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따라왔다. 눈을 뜬 다음 정말 무지개를 찾을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주변을 살필 겨를 없이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가 아쉬워하는 게 있다면 순식간에 세상이 바뀌었다는 게다. 헌데 와중에도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면 하던 아이들이 이제 나이 들어 모였다는 사실에 새삼 감격한다. 콧물을 달고 살던 겨울날의 맹추위와 칼바람, 밭둑에서 빼먹던 무의 상큼함, 봄날의 알록달록하던 소풍 기억, 여름 아이스께끼의 달달한 맛과 옥수수빵에 얽힌 이야기 들을 하며 웃었다. 각각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지만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자 그게 공통분모라는 것을 알았다. 달라지는 세상에 편승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 각자 얼마나 먼 곳을 떠돌고 있었던가를 생각했다. 비로소 돌아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감격하여 자리를 옮기고서도 헤어지지 못했다. 나중에 데리고 가겠다며 동생이 달려왔지만 두어 시간을 더 기다리게 했다. 익은 술과 깊은 밤과 혼곤한 이야기들로 아무도 일어나지 못하는 자리. 와중에도 세상은 쉴새없이 바뀌고 있지만 밤하늘 별처럼 반짝이며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Fariborz Lachini, I Reached The Edge Of Autumn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