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가 찾아왔다. 찻집에서 만나 주문판을 보는데 주위 사람들 놀란 시선도 아랑곳없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왜 이래?"
"이렇게 늦어서야 선배님께 죄스러움을 사과드립니다."
온 나라에 민주화의 광풍이 몰아치던 때, 너도나도 불만을 드러내고 소리치던 시절,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아 물고 늘어지던 녀석이다. 심지어는 유리컵을 던져 이마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일이 커질까봐 말리던 주변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자칫 어떤 사달이 났을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바람 앞에 파르랑대던 촛불이라도 지키려는 간절함으로 숨죽이며 지난 시간이 떠오른다. 미운 녀석들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먹으로 콘크리트 벽을 얼마나 때렸던가. 피범벅된 나를 거울에 비춰보며 '괜찮다! 대견하다!'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지우지 못하던 울분. 외줄을 타듯 위태위태하게 견뎌 비로소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몸도 영혼도 피폐하기만 해 사랑이나 미움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혹여 누군가는 중얼거린다. 사랑하는 이유야 수백 가지이지만 미워하는 이유야말로 딱 한 가지 뿐이라고. 한때 내가 누군가를 미워했듯, 나를 미워한 당신은 누구인가.
Giovanni Marradi, Mil Bes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