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가리고 하늘을 찌르던 산이 지금 보니 별 게 아니다. 드문드문 차창에 찍히는 빗발을 지우며 내비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조붓이 앉은 시골 마을 앞에 섰다. 밥주발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산을 필두로 길게 쫓아들어간 골짜기 안을 기웃거린다. 외진 곳에 방문객이라니. 난데없이 들어서는 차를 보며 마을회관 앞 평상에 옹기종기 앉아있던 어른들이 일어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저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수십년 전에 외갓집이 이곳에 있었습니다만."
"아, 그래요? 어른 함자가 어떻게 됩니까?"
설마했다. 똑바로 나를 보며 묻는 사람의 고집 센 입술과 우뚝한 콧날이 익숙하다. 마을 수호신처럼 둘러싼 사람들이 경계의 눈길을 준다. 그렇찮아도 무료할 참에 쭈볏거리며 나타난 내가 두려운가. 틀림없이 여기가 기억에 있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인지 사뭇 궁금한 얼굴이다. 아슴하지만 굽이굽이 돌아온 신작로를 따라오며 동심에 있던 그림 조각을 멈칫멈칫 더듬었다. 그때와는 달리 무성한 숲으로 뒤덮인 산들. 이모가 동네여자들과 입담을 나누던 우물은 저쯤이었을까. 밥상에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나면 부리나케 쫓아가던 저 산등성이 아래 냇가 맑은 물에는 그때처럼 물매암이가 수면에 원을 그릴까. 밤마다 희끗한 도깨비 불이 맴돌던 언덕이 어디였더라. 집 주변 가득하던 감나무들은 어디 갔을까. 따져보니 오촌아재쯤 되는 인척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아, 잘왔네."
비로소 사람들이 얼굴을 편다. 아재가 손을 잡고 흔들며 반긴다. 농삿일로 못이 박힌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기운. 다른 어른들이 너도나도 이가 빠진 잇몸을 드러내며 해맑은 웃음을 내비친다. 상기시키듯 든 손가락쪽에서는 예전 집 흔적조차 찾기 힘들지만 거기로 걸음을 떼는 동안 흘려버린 시간이 눈물겹게 되살아났다. 사랑채가 있던 둔덕 아래 쑤썩대던 대나무들이 온몸을 흔들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칠 적부터의 이야기를.
Chris Phillips, Eternal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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