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감자처럼 뒹굴고 싶어

*garden 2015. 7. 6. 00:01








장마가 시작된다나, 밭에 심은 감자를 생각했다. 채 여름 전부터 달아올라 해가 오르면 무간지옥이다. 가뭄이 심해 채마밭에 나가면 다들 시들시들했다. 감자 싹이 꽃도 피우지 못하고 말라 죽는 게 태반이어도 비에 썩힐 수야 없지. 이제나저제나 작정하지만 도무지 짬이 나지 않는다. 낼모레부터 비가 뿌린다는데. 만사 제치고 허드렛복을 찾아 입었다. 별반 기대하지 않고 흙을 파헤치며 더듬는데 삐질삐질 땀은 나지만 생각보다야 작황이 좋다. 얼뜨기 농삿꾼에게는 이도 횡재를 한 것처럼 황송하기 짝이 없어 지신에게 감사부터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나눌 정도로는 적다. 그래도 기꺼이 아무하고라도 함께 먹어야지.
구황식물로 알려진 감자는 많은 요리 재료에 사용된다. 먹을 게 많아서인지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된장국에 쑹쑹 썰어 넣어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황홀하다. 두 개가 달라붙어 하트 모양이 된 감자도 나왔다. 돌을 보며 허기를 달래기 일쑤인 북촌 대감네에 보내 놓으면 식구들이 모인 어느 때 전이라도 후딱 붙여 비설거지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는 1998년도에 작성한 글인 듯하다.









막내외삼촌이 결혼한다. 온동네 아낙이 잔칫집에 모였다. 그야말로 참새떼와 다를 바 없이 재잘거린다.
"이 집 허우대 좋은 신랑은 어디 있대?"
"어, 자네가 그걸 왜 물어? 인자 남의 신랑될 사람을!"
깔깔거림이 커진다. 앞말이 잘려 막 들어선 아낙은 영문을 모르지만 웃음에 동참했다.

평생 농사일로 못이 박힌 할머니 손끝은 딱딱했다. 감나무 수피도 마찬가지로 갈라터졌는데 자고나면 홍시를 떨어뜨렸다. 그걸 누군가 주워 장독에 올려 둔다. 속살 터진 곳에 징그럽도록 까만 개미가 들끓었는데, 빨강과 검정색이 어울리는 게 섬뜩하다. 달착지근한 맛이 뭉쳐 목으로 넘어간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삼켰을 개미 때문에 조바심이 난다.
어른 키보다 높게 돋운 집 대청에 서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크게 삼등분하여 위쪽에 들어앉은 우람한 산. 그 아래 미처 떠나지 못하고 웅크린 안개가 몸통을 낮춘다. 한뼘씩 늘어진 논과 옹기종기 기댄 초가들. 옆으로 잡아늘인 듯한 들을 구분지은 논둑길에 바지런한 아낙들과 머리에 인 양동이나 들것이 들쑥날쑥하며 끄덕인다. 우물에 가는 길이다.
마을의 크고작은 소식이나 안방 얘기까지 슬그머니 거론된다. 씻어야 하지만 북새통에서 쉽지 않다.
"니 운제 왔노? 이리 와 바라."
너도나도 한 번씩 볼을 꼬집어 얼얼하다. 두레박으로 길어올린 물은 싱싱하다. 퍼득거리며 세수를 하고 떨치듯 벗어난다.

어제 밤이 이슥해서야 도착했다. 아버지를 따라 진작 와 있던 남동생이 마당에서 아장거린다. 형을 보며 반갑다고 두 손을 내밀며 뒤뚱거린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예정에 잡혀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나쁜 일이거나 좋은 일이거나 당연시하여 태연히 받아들이는 어른들. 나쁘면 좋아지겠거니, 좋으면 나빠질 수 있겠거니 하며 더러 액땜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은연 중 가슴 속에 둔 바람이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이끌어 주겠거니 하면서.
여름내 장마에 흙이 쏠려 비죽비죽 내민 돌 위에 동생이 기우뚱한다. 아래위 가지른한 이로 혀를 문 채. 소리도 없이 자지러진 입가로 새빨간 피가 몽글몽글 흘러나온다.

대나무로 둘러싸인 사랑채는 내 여린 가슴을 졸이며 단련하는 곳이다. 종일 햇빛도 들지 않는다. 마음 놓고 도사린 어둠과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 두려움 들이 묘하게 엉켜 있어 여인네들은 얼씬도 않았다. 외할아버지의 잔기침 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왜정때 순사들에게 치른 곤욕이 오죽 했어야지. 쯧쯧!"
주변 우려보다 당신의 의지가 강했다. 용하게 일어났지만 망가진 신체는 회복되지 않는다. 이후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신음이 절로 난다. 헌데 그게 지팡이 놀림과 묘하게 박자를 맞추기도 한다. 사랑채 안마당 숫돌에서 아침마다 머슴들이 낫을 간다. 정갈한 심정으로 예를 펼치듯, 도를 깨치듯 엄숙하게 앉았다. 그들의 어깨 위로 삼엄한 기운이 뭉클뭉클 솟는다. 시퍼런 날이 세워지면 의기양양하게 지게를 지고 나간다. 돌담 한귀퉁이에 메꽃이나 분꽃이 소담하게 모여 그나마 삭막함을 누그러뜨린다.
사랑방 옆 초당 바닥에 멍석을 깔아두어 계절이 다 가도록 감자를 널어 둔다. 겨울밤 나와 이종들이 몰려간다. 그리고는 가마니 짜는 머슴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속 도깨비나 호랑이, 선녀와 나무꾼이 횡행하는 세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대숲에는 뱀이나 두꺼비가 들끓었다. 호기심이 일어도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앞 산만큼 쌓아둔 두엄이 내내 썩어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두엄이 들썩거린다. 휘둥그레한 눈으로 살펴보면 모이를 찾던 장닭이라도 불쑥 나타나 간이 콩알만해진다.

동생을 업고 냅다뛴 아버지의 하얀 셔츠가 새빨간 피로 물들었다. 나는 초당 바닥 감자를 치우고 동그마니 허물어져 내렸다. 오늘은 쟁기질도 없어 외양간에 매둔 소가 울기도 한다. 아무도 찾을 수 없다. 내가 거인처럼 커져 세상을 덮을 것처럼 마을 위에 우뚝 섰다가 아침에 홍시 속살과 함께 삼켰을지 모르는 개미처럼 순식간에 작아지기도 했다.







G. Moroder-C. Bennet, El expreso de medianoche
Sirtaki, Greek Folk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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