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憤抒情

우리가 나무였을 때

*garden 2015. 10. 23. 00:20




"영수도 와야지.....!"
쑥덕거리면서 다들 문쪽에 시선을 둔다.
'영수가 누구지?'
보면 알겠지만 되짚어도 감감하다. 익숙한 이름이나 얼굴은 지나친 습관까지 소상히 기억하면서 왜 어떤 부분은 사막 한가운데 떨어뜨린 바늘처럼 기억의 흔적도 없을까. 오랜만에 만난 동무들이 차츰 옛이야기로 서로 공감하여 달아오른다.
"그래도 그렇지. 출출한데 우선 술이라도 시켜."
두말 없다. 주류가 아니더라도 오늘은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눈치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어서야 들어온 영수.
'가만..... 누구더라?'
조무래기들이 들끓던 학교 운동장과 낡은 교실과 오후 햇살이 종종대던 복도 마룻바닥을 떠올렸다. 기억 한쪽에서 마주치던 그 눈이 비로소 생각난다. 다가와 갸웃거리는 영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다. 나 알겠지?"
"어, 그래. 멀리서 왔구나!"
입가에 띄는 미소를 보며 잡은 손이 의외로 거칠다. 눈만 뜨면 한데 몰려다니던 우리. 더러 가까이 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동네가 다르면 사는 모습도 틀린다. 내가 영수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어느 때 아침, 등교한 영수에게 뒷자리 쌈꾼이 시비를 걸었다. 힘세고 사납기로 소문난 녀석이었는데, 교실 뒤편 책걸상을 민 자리에서 맞붙었다가 영수 주먹에 얻어터져 코피가 나면서 싸움이 싱겁게 끝났다. 작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큰 녀석과 맞선 기세가 대단하다. 아이들의 성원을 받으며 자리에 앉은 영수의 가라앉은 눈빛은 침착했다. 억세고 굽히지 않는 그 기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나중에야 그게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러서서 패배한 자기 모습을 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치욕이다. 그런 영수가 반장이 되었다. 나는 의아하다. 반듯하고 단정한 아이들도 널려 있는데, 선생님이 왜 영수를 반장으로 내세우는지 알 수 없다. 어렴풋이 짐작하는 건 정의감이 뭔지 아는 영수가 대견했을 게다. 잡은 손을 통해 따뜻한 온기가 흐른다. 세파에 짓눌리고 찌들어 어느덧 삶이 힘겹고 초라하지만 입가에 머금은 미소와 정겨운 눈빛만으로 지난 세월이 허용되는 우리가 감회에 젖는다. 그때 우리는 이미 하나의 숲으로 어우러져 있지 않았을까. 내옆 아이들은 모두 참나무였다. 때로는 키큰 은사시나 봄날 화사한 꽃을 뿌리는 산벚나무나 푸르름으로 속을 채운 물푸레나무가 있어도 그걸 배제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눈을 감고 잊은 듯 여겨졌다가도 어느 때 그게 '우리'라는 숲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밤안개가 흠뻑 내린 거리에 얼큰해져 쫓아나왔다. 바람이 불 적마다 뺨에 와 닿는 물기가 선득하다. 서로 어깨를 부여잡았다. 가로등에 비친 그림자가 뭉뚱해졌다가 생물처럼 떨어지기도 하고 길게 늘어나기도 한다. 가을이 들이차 마른 잎이 허공을 휘저었다가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Melinda Dumitrescu, Peace Is Flowing Like A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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