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憤抒情

기영이

*garden 2016. 3. 10. 14:32




공처럼 동글동글한 우리 박박머리들은 공부야 뒷전, 쉬는 시간에도 공을 찬다. 학과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부리나케 운동장으로 쫓아나갔다. 골대를 한 면만 쓰므로 우리말고도 서너 팀이 뒤엉켜 분주하다. 소리치며 이리저리 휘저었다. 어느 순간 공이 내게로 흘러와 발을 쭉 뻗었다. 공이 발끝에 걸리며 반탄력으로 방향이 꺾여 절묘하게 골대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함성이 이는 동시에 종이 울렸다. 교복에 묻은 흙을 떨고 헐떡거리며 교실로 되돌아 오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기영이다.
"후아, 막판에 우찌 그래 골을 넣노? 니 덕분에 우리가 이깄데이!"
내기를 했으니 질 수도 있었다. 방천쪽에서 불어오는 사정없는 찬바람 때문인가. 다들 달아올라 볼이 발갛다. 승패야 병가지상사라지만 신 나게 뛴 다음 내가, 그것도 멋진 골로 마무리를 했으니 날개를 단 듯한 기분이다. 함께 뛴 아이들이 콘크리트 계단을 올라가다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우쭐했다. '씨익~' 웃어 주는 게 우리만 통하는 사인이다. 헌데 묘해. 기영이는 오늘 어떻게 축구를 함께할 생각을 했을까. 늘 어울리면서도 뒤켠에 쳐져 무리 속에 들려고 하지 않는데 말야. 열심히 공부 하는 것 같지 않아도 성적은 늘 우수했다. 하얀 피부에 눈망울이 커 슬픈 듯 보인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용하다. 장난기라고는 아예 없어 짖궂은 내게 쉽게 걸려들곤 하는데, 그 다음이 난처하다. 대개 장난은 암묵적으로 통해 쉬이 넘어가기 일쑤인데 얘는 그렇지 않다. 따라다니며 '왜 자기에게 그런 장난을 쳤는지' 따진다. 보다 못해 친구들이 캐물을 정도였다.
"쟈가 가시나처럼 생기갖고 니한테 와 카노?"
"그러게, 꼭 밴댕이 소갈딱지 같아서 어리둥절하네."
"우리 기영이 한번 골려주자."
다른 친구가 안을 내고 너도나도 찬성해 엉겁결에 나도 동조하는 축이 되었다.

우리에게 따분한 게 날이면 날마다 해야 하는 숙제다. 쉬는 때 짬을 내 다음 시간 과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늘 숙제를 깔끔하게 해 오는 기영이 노트를 빌려 베낀 다음 이리저리 돌리다가 주지 않고 감추었다. 다음 시간이 누군가. 엄하다 못해 사납기로 소문난 기하 선생이지 않은가. 공책이 없어지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지. 공부 시작 종이 울리고, 반장의 구호로 인사를 마쳤다. 그제서야 공책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기영이가 울상이 된다. 작당한 아이들이 시침 떼고 있는 사이에 숙제 검사가 시작되었다. 숙제를 못한 아이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나갔다. 드디어 검사를 끝내고 선생이 참나무 막대기로 교탁을 '탁탁' 쳤다.
"너희들이 아직 정신을 못차린고로 이 정신봉으로 하여금 따끔하게 일침을 놓겠다."
말끝에 선생이 슬쩍 눈을 까뒤집었다. 습관이다.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나간 아이들이 차례로 매를 맞는다. 다섯대씩인데, 단 한대만에 기겁하며 두 손을 오금에 넣고 종종 뛰는 모습을 보면서도 웃을 수 없다. 드디어 기영이 차례가 되었다. 정작 찔린 녀석들이 있을텐데, 그 누구도 눈도 끔뻑하지 않아 나도 태연히 있을 수밖에. 기영이가 하얀 손을 내밀었다. 선생이 내리친 참나무 막대기가 짧고 강한 마찰음을 냈다. 기하 선생은 원래 검객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허공을 휘저은 칼날이 목표물에 닿을 때까지의 거리와 속도, 힘 조절이 절묘하다. 가장 알맞은 타격점을 찾아 고통을 준다. 선생이 득의의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아차!' 했을지도 모른다. 손바닥에 닿은 순간 막대기 끄터머리쪽으로 치우쳤다. 눈치 채지 않게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번에야말로....'
팔에 힘을 주려면 어깨 근육과 목 근육이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 매를 치켜든다. 조금 전까지 울상이던 기영이 표정이, 어랏! 아무렇지 않다. 선생도 놀란 눈치다. '이것 봐라?' 싶었겠지. 이번에는 더욱 세게 내려쳤다. 손가락이 끊어질 듯할텐데 이번에도 기영이는 빨간 입술을 꼭 다물고 '꾹' 참았다.
'그러고보니 숙제를 잘해 오던 녀석이잖아.'
미간을 잔뜩 찌푸린 기영이를 다시 본다. 나머지 매는 짧고 약하게 끝냈다. 여리고 계집애 같다며 놀리던 아이들이 새삼 놀랐다. 혼나면서도 굳이 핑게를 대지 않는 기영이가 대단했다. 웬만한 아이 같으면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그 일이 벌어진 며칠 후였다. 느닷없이 기영이가 내게로 왔다. 자기 집에 가자고..... 이걸 어떡한다? 설마 저번 일을 두고 앙갚음을 하자는 건가. 친구들이 주도한 행위이지만 게름칙하다. 헌데 기영이 표정에 그런 기미는 찾을 수 없다. 설마 나쁜 일이야 생기지 않을거야. 쾌히 승낙하고 따라간다.
'헌데 그냥 가도 될까?'
가는 내내 궁금증이 무럭무럭 커졌다. 다행히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기영이 어머니께 인사 드리고, 다과를 얻어먹은 다음 툇마루에 앉아 또래끼리의 얘기를 두서 없이 나누었다. 저녁 햇살이 늬엇거린다. 어른들이 걱정할 것 같았으므로 나도 바삐 일어섰다. 기영이가 서운한 듯한 눈길을 보낸다. 헌데 놀랍다. 배웅을 받고 돌아선 순간 허전해졌다. 마치 바닷가 조약돌처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기분이다. 이렇게 헤어지기 싫다니. 기영이 눈빛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하 선생한테 손바닥을 맞으면서도 아무렇지 않던 아이 눈에 눈물이 글썽하다. 어떤 점이라고 딱히 끄집어 낼 수 없지만 비로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친구를 사귄 기분이다. 사실 친구가 별 건가. 쫓아나가면 여기저기 널려 차라리 친구 아닌 애를 고르라고 하는 게 빠를거다.
진천귀농인, 감초대왕, 시골신사, 낙타기병대, 캐리비언해적, 농약병따까리, 공주1, 공주4, 호수대감.....지금도 내가 한밤중이라도 들어가면 '꾸벅' 인사 매너부터 날리는 사이트 친구들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은연중에 우리는 단짝이 되어 붙어 다녔다. 성격상 앞에 나서지 않는 기영이를 대신해 내가 대변한다. 신중하게 선택한 다음 결과가 좋으면 다행이다. 그런 때면 목젖을 울리며 '켈켈'거리는 모습에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얘기를 나눌수록 우리가 닮은 점이 무척 많다는 것을 점점 느낀다. 생각의 파장이나 결과를 예측하는 것까지 거의 같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이렇게 신기할 수 있다니.
학년이 올라가 다른 반이 되었다. 기영이는 문학반에 들어갔다. 내게도 권했는데, 그게 썩 내키지 않는다. 행사라든지 필요할 적이면 언제든지 가겠라고 했다. 서운한 듯하다. 어떤 때는 자기가 쓴 시를 읽어주는 기영이와 교정 풀밭에서 저녁 늦게까지 앉아있기도 했다.













Sean Michael Paddison, Wouldn't Change A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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