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을 지친 메마른 바람은 냉기를 품어 맨살이 아렸다.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등을 떼밀려 간다. 여기는 사시사철 바람만 드센 자리. 앞쪽 언덕배기에 흙먼지가 일었다. 이 황량한 길을 가며 오래 전 살던 집을 떠올리다니.
이상하게도 집은 늘 비어있었다. 나무대문을 삐걱이며 들어가 혼자 있는 게 싫다. 문설주에 동그마니 기대섰다가는 걸음을 뗐다. 아랫골목으로 내려갔다가 꺾어들어서는 점빵이 있는 건너편 골목을 돌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한 바퀴 돌아오면 식구 중 누구라도 와 있을 줄 알았는데, 기웃거려도 기척이 없다. 그래서 동네를 한 바퀴 더 돌기로 했다. 골목은 다닥다닥 붙은 집과 집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백년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실타래처럼 이어진 길을 따라가며 어릴 적 휘젓던 골목을 생각해냈다. 길이 실핏줄처럼 휘감아나가다가 곧게 펴지기도 한다. 가속페달을 밟자 달궈진 햇살처럼 쫓아나가는 차창을 내렸다. 거침없이 누비던 산과 들이 겹쳐진다. 가로등이라든지 조경수로 심어둔 나무들이 휙휙 지나쳐갔다. 바깥 소음과 틀어둔 차내 음악이 뒤섞여 허공 중에 흩어졌다. Mark Knopfler의 한결 빨라진 Going Home의 뒷부분이다. 이발을 못해 더부룩한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형님, 어디쯤입니까?"
이마트에서 차례술과 과일 등을 고르는 중에도 동생은 마중 나오겠다며 몇 번이나 연락했다. 장바구니에 담은 술을 보고, 명절 프로모션으로 딸린 선물을 챙겨주는 술코너 담당 아가씨는 한복이 익숙하지 않아 상체를 숙이면 뽀얀 맨살을 드러내곤 했다.
숱이 휠씬 적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동생은 현관에서 활짝 웃었다. 어느새 낯선 주름이 깊이 패어있다.
"이야, 너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식사를 물리고 술을 곁들인 자리에서 동생이 친인척과 주변 사람 들 얘기를 하나둘 꺼냈다. '아아!', '그래....'. 맞장구를 치며 아련한 시절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기러기처럼 그렇게 돌아오길 잘했어. 동생 어깨를 두드리며, 건강하라는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에 직장을 잡았을 때 부딪친 문제가 있었다. 재정보증인을 세우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자그만치 세 명이나 필요했다.
"글을 쓰는 출판사에서 무슨 재정보증인이 필요해?"
의문스럽지만 해야 할 일은 처리해야 한다. 정년퇴직해 칩거해 있던 아버지가 올라오셨다. 어찌어찌하여 방배동 뒷골목 주택가에서 사촌고모님을 만났는데, 당신들은 오가는 사람들 시선도 아랑곳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기만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방 후 월남하여 처음 만났으니 오죽했을까. 고모님댁에 가 자리한 다음에도 격정은 가시지 않아 두 분 눈자위가 다시 붉어졌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당신을 보아 온 나로서는 의외의 일이었다. 그게 지금처럼 연락이 쉽지 않던 시기에 어떻게 고모를 찾을 수 있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단지 아들의 재정보증인을 세우려는 일념에 생전 찾지 않던 고모까지 찾아간 어른 심정이 오죽했을까. 헌데 동생이 전하는 이런저런 소식을 듣다 보니, 나야말로 태무심하였다. 찾아오거나 곧잘 볼 수 있는 일가붙이밖에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하여 낯을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Omar Akram, Take My H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