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부스스 일어나 눈을 부비면서 보는 머리맡 새옷. 좋아하는 우리를 보며 엄마도 미소 짓는다. '얼른 입어보라.'고 채근하는데 잉? 장만한 옷이 대개 컸다. 매번 헐렁한 옷을 접어 입어야 하는 우리는,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눈에 띄게 크지 않았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다른 차가 긁고 지나갔다. 흠이 예사가 아니다. 공장에 넣기로 하고 출퇴근을 해야 하므로 차를 보내달라고 했다. 헌데 빌린 차가 차종이 익숙치 않아서인지 불편하다. 오르내릴 때마다 바닥 깔개도 걸리고, 가속페달을 밟으면 소음도 심할 뿐더러 운전석 의자를 드높여도 앉은뱅이처럼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기분이다. 운행중 핸들이 쏠리는 느낌이며, 브레이크를 밟으면 차체가 밀려 조바심쳤다. 한이틀 참으면 되는데 뭐. 불편을 감수하다가 내 차를 갖고 간 공장 수리기사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사실 어림짐작으로 사 온 핸들커버가 헐거운 채 그냥 씌워 두었지 않았던가. 혹여 모르는 이가 운전대를 잡을 적이면 커버가 겉돌아 기겁하곤 한다. 내 딴에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다루었건만 얼결에 보낸 다음에는 그게 신경 쓰인다. 물론 그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조심스레 넘어갔겠지만 성격이 까탈스럽다면 한마디로 그쳤을까. 그러고보니 정상적인 것 같아도 짚어보면 어딘가 기우뚱거리는 부분이 제법 많다. 과연 주변에 제대로인 것이 몇이나 될까. 노트북은 회사와 OS 환경을 맞추느라 버젼을 하향시켰더니 걸핏하면 업그레이드 팝업창이 뜨는데 무심코 눌렀다가는 먹통이 되곤 했다. 그뿐이면 괜찮지만 글자를 입력하는 중에도 커서가 제멋대로 움직여서는 엉망이 되거나 오류 등으로 도무지 문서를 작성할 수 없다. 동시에 갤럭시 태블릿은 아예 맞는 전자펜이 없어 사용할 때마다 부아가 치민다. P펜은 이미 단종되었다지 않나. 제법 이름난 일제 펜은 애써 구해와도 작동이 되지 않았다. 이미 지출된 비용에 얽매여 비합리적 선택을 할 때 쓰는 용어로 콩코드효과라는 말이 있다. 이를 매몰비용(sunk cost effect)이라고도 하는데, 돈이나 노력, 시간 등이 투입되면 그것을 지속하려는 성향이 강하게 이어진다고 한다. 즉 낭비를 싫어하고, 또 낭비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게 싫은 동시에 과오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기합리화 욕구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설퍼도 내색 않고 지내려는 참이니 오죽할까.
여행을 떠났다. 대절한 버스가 꽉 차 일정을 소화하는 중에 누군가 불평한다. 자리를 바꿔 달라는데, 이유인즉 앉은 좌석 옆 차창이 덜컥거려 소음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도중에 버스를 바꿀 수도 없어 운전기사도 난처하다. 결국 그녀가 앉아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대신 앉았다. 문제는 그렇게 그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함께 움직이는 일행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안겼다. 그럴수록 다른 사람들은 움츠러 들었으며, 그녀는 곧이곧대로 불편함을 제기하는 용감한 일을 그치지 않았다. 창이 '달칵'대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 표정을 무어라 해야 할까. 그래도 내색치 않는 그들의 인내심도 놀라웠지만 여행중에 하등의 불편을 겪을 수 없다는 그녀의 뻔뻔함이 나로서는 오히려 부러울 따름이었다.
불편함은 사용하는 물건이나 환경 뿐만 아니라 제도 등에서도 비일비재하여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휴일이면 오후 한시까지 자는 우리 아이는 눈 뜨면 개운한 듯했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며 마음에 둔 나는 몇날며칠 불편하다. 겨우 환기시켜 잊을 참이면 다시 휴일이 되어 아이의 게으름이 되풀이되는데, 마냥 화내는 나쁜 아빠가 되어야 하나. 아니면 무관심으로 대체하여 이러한 불편함도 과정으로 여겨 받아들이자고 굳게 작정하는 이 심사는 과연 옳은 것일까.
David Lanz, Nights In White Sat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