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마당

한 식

*garden 2016. 5. 12. 13:56




동지로부터 일백오일째 날인 한식(寒食). 음력 이월이나 삼월에 들기도 한다.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에서 이날 유래를 찾기도 하며, 중국 진(晉)의 개자추(介子推) 전설에서 의미를 되새기기도 한다. 겨울 끝이라 해도 마음 놓을 수 있어야지. 한랭전선이 오르내리고, 비바람으로 집을 나서는 걸음이 멈칫거려진다. 한식을 앞두고 문중 산소 주변을 손보게 했는데, 이런저런 말 끝에 흘려듣는 얘기가 의아하다. 산소 아래 누군가 들어와 살고 있다는데.....

간단하게 차리자고 누누히 일러도 집안 여자들이 고개를 내젖는다. 어차피 하는 일이라나. 그러다보니 전날 종일 차례음식을 장만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은 남자들의 몫이다. 제기 등과 이를 싸서 이동하는 일도 만만찮다. 차례를 지난 다음 한 끼니라도 나눠야 하므로 커다란 솥단지에 찰랑거릴 만큼 국도 담았다. 아침저녁 냉기가 엥간해야지. 한 며칠 감기 기운이 있는 듯하다가 가셔 그나마 다행이다. 다행히 비가 그쳐 해가 한뼘이나 솟아도 차 안 히터를 올려야 했다. 이른 시각 개울창 위 물안개가 자욱하다. 아이들은 낯선 이름의 한식으로 동행하는 게 영 떫떠름한 표정이다. 너희들도 보고 배워 앞으로 어른이 없어도 대를 이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누차 일러도 심드렁하다. 산소 주변 공터와 묵정밭 얘기도 나누었다. 매실나무라도 심어 두면 열매라도 유용하게 딸 수 있을텐데 하고. 어른들은 묵묵부답이다. 재차 여쭈어도 고개를 흔든다. 거기 누가 기거할 때 말이지. 밭을 일군들 내려오는 산짐승이 죄다 파헤쳐 여의치 않다. 매실나무를 심어도 누가 돌보고 건사하느냐며 외려 역정이다. 괜히 오가는 사람이 해치우면 속만 끓인다며 애초 문중 산소라는 용도 외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염려한 것보다 길이 심하게 막히지 않았다. 텁텁해진 차 안 공기를 바꾸려 얘기를 끊고 차창을 내렸다.
"이제 저기만 돌아가면 돼."
농로로 만들어진 외길을 조심스레 올라가며 다독인다. 헌데 저기 언제 집이 들어섰나? 갑자기 차가 들이닥칠 줄 몰랐겠지. 집앞 뜨락에서 빨간 내복 차림으로 활보하던 여자가 황급히 자취를 감추었다. 공터에 주차하고 내려 기웃거릴 동안 여자는 문을 꽁꽁 닫아 걸고 경계를 거두지 않는다. 일가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다들 눈을 크게 뜬다. 의식 앞에 왈가왈부할 수 없으므로 애써 언덕 아랫집을 외면한다. 그래도 나중 누군가 기어이 운을 뗀다.
"저건 우리 땅이 아닌가."
"아니, 이쪽 밭은 우리 게 분명한데 운제 쟈들이 차지했네."
지적도를 갖고 올까. 경계를 허물어뜨린 범인에게 들이대고 따져야 할까. 이런저런 얘기에도 태무심한 어른들이 못미덥다. 그나마 주변이 황량하지 않은 건 저 사람들이 돌보아서라고 위안 아닌 위안을 가질까. 대면하기 전부터 거부감마저 일던 부부를 위해 변호를 대신한다. 오죽하면 여기 들어와 살 작정을 했을까. 아래쪽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는, 남편이 병치레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인가와 떨어진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건사하지 못하는 내 땅에 다른이가 들어와 있는 게 걸린다. 그런 경계심리도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자 하잘것 없다. 왜 예전 할머니도 그랬지 않나. 안골 정실이 아지매를 그렇게 욕하다가도 어느 때 집에 오면 부리나케 움직여 풋고추 쑹쑹 썰어넣은 된장국에 수북히 뜬 밥을 씀뻑 내어놓듯.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차례를 마치고 음식을 담아 내려갔는데 한사코 안받는다. 눈이 땡그란 여자는 깡마른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예전과 다른 세상이야. 요즘 누가 준다고 아무 음식이나 받겠어?"

그리고도 몇번의 한식을 더 건너뛰었다. 더러 마주칠 뻔해도 그네 부부는 용케 빠져나가 데면데면한 관계를 지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제 으레 그런가 하고 지나치게 되었는데, 작년인가 남자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살지 못할 병이었나 보네."
이번 한식에는 무관심과 다른 심리로 살펴볼까 했는데, 아아..... 여자가 내복 차림으로 종종거리던 뜨락엔 새 주인이 줄을 뿜어 꿈틀대고, 보라색 제비꽃이 여기저기 돋아 있었다. 휙 지나버린 봄 때문에 퇴락한 철쭉 무리가 허접하게 사람을 맞는데, 한 십년 너끈하게 살 거라며 지은 집은 문이 봉해진 채 쓸쓸하게 내려앉는 중이었다. 우리네 살이가 끝이 엄연한데, 어찌 그렇게 바둥거리며 눈 흘기고 악착 떨었는지 망자에게 삼가 미안스런 마음이다.

















Yuki Kajiura, Grandpa's Vio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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