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자주닭개비

*garden 2016. 5. 20. 13:10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고 어마어마한 사람이 머무는 빌딩. 사람이 모이는 곳은 늘 화려하고 으리으리하기 마련. 바닥 대리석이 반들거리도록 닦기 위해 하늘색 작업복을 걸친 아주머니들이 동분서주한다. 종일 그 자리에서 인형 마냥 배꼽인사를 일삼는 안내원도 많다. 자칫 억하심정이 생길까 봐 동선도 줄이며 다니다가 아래층 가장 구석진 곳에 옷 수선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한 얼굴의 남자 둘이 오가다 던져 놓는 수선물을 밥줄로 감지덕지하는 거기 우연히 들르게 되었다. 주머니가 해져 입지 못하는 등산복을 갖고 갔더니 재봉틀로 박아 순식간에 말끔해졌다. 제법 고가로 구입해 대리점에 갖고 가 맡겨도 되지만 바로 수선되지 않는다. 또한, 나중 다시 찾기가 번거롭다. 몇번 수선해도 기능성 천이 오래된 때문인지 재질 다른 고무 같은 것을 압착시켜도 그때뿐 금방 다시 떨어졌다. 숲속을 안방처럼 헤집고 다녀 가시나 나뭇가지 등에 걸려 찢긴 게 한두 군데여야지. 이런저런 이유로 쳐박아 두었던 것을 갖고 갔더니 꼼꼼하게 박음질한 솜씨가 마음에 든다. 그 참에 더러 안맞아도 억지로 옷에 몸을 껴맞추어 입고 다니던 기성복을 이것저것 챙겨 가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직구입으로 산 미국산 겨울 남방도 팔만 의외로 길어 쳐박아 두지 않았던가. 다시 꺼낸 여름 양복 등도 손볼 것을 챙기다 보니 의외로 많다. 진작 이런 허드렛일 하는 곳을 알아 두었어야 하는데. 새삼 보물창고를 찾아낸 것처럼 쫓아가서는 간섭하는데, 웬간한 장인들은 고집을 내세워 뻣뻣한데 이 치들은 그런 기색도 없다.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안을 내지 않고 해달라는 대로 하는 편이다. 살아온 그림이 한눈에 보여 입을 다물었다.

살아 있는 동안 옷이라든지 구두 등을 더 이상 구입하지 않을거라 여겼는데 섣불렀다. 때가 되어 걸치거나 신으면 구질구질했다.
'이 옷으로 견뎠다니, 이 구두를 어떻게 신고 다녔을까?'
입기 싫어도 어머니가 억지로 입혀 주던 어릴 적 새옷과 달랐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도 감수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럴 수 없다. 옷을 보러 가면 고수하는 스타일을 한눈에 알아본다. 눈치 보며 권하는 구식 옷을 뿌리치고 한술 더 떠 몸에 착 달라붙는 옷도 입어 본다. 참나, 오래 살고 볼일이지. 어쩌면 새것으로 스타일을 바꿔 개비하듯 나중에는 몸도 새 부속품으로 갈아끼워 수선할 수 있을거야. 장만한 옷을 한 보따리 들고 나오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싹을 틔우자말자 기꺼이 곤충의 먹잇감이 되는 꽃을 보았다. 어딘가 잘못되어 구부정해도 태생으로 몇백 년을 견디는 나무도 많다. 꽃 핀 모습을 보고서도 한번도 제대로 찍은 적 없던 자주닭개비의 사진도 우리 풀꽃이나 나무 만큼 아름답다.















Frederic Delarue, A Rainbow of Flowers








'不平則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월 푸른 안부  (0) 2016.06.09
지난 사랑  (0) 2016.05.29
오월 숲  (0) 2016.05.03
봄날 애상  (0) 2016.04.26
우리가 바라보던 봄  (0) 2016.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