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날린 낙엽이 길바닥에서 춤을 춘다. 길 건너던 강아지가 앞발을 촐싹대며 날뛰었다. 목줄을 잡고 있던 주인이 의아해 뒤돌아본다.
아이는 사흘 밤낮을 잤다. 자다 말고 갈증이 이는지 냉장고 안 소주도 꺼내 마시고, 패트병 맥주도 반쯤 비웠다. 언제 나가서 사 왔는지 바닥에 과자 부스러기 등도 떨어져 있다. 오랜만에 저녁 식탁에 마주앉았다. 반주를 하다가 한잔 건넬라치면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며 버티다가도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으면 폭식을 했다. 두고 보다가는 참을 수 없다. 이상징후를 찾아내야지. 이것저것 잔소리도 늘어놓았다. 거기에는 민감하다. 생전 대꾸 없던 녀석이 발끈한다. '아이, 그러지 마세요!'라며 분명한 거부 의사를 보인다. 이건 무얼까. 요는 혼자인 생활이 익숙한 듯했다. 누군가 간섭하면 불편하다. 그러고보니 잘 웃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공항에서 '씨익' 웃던 그게 웃음의 끝이다. 제 동생 말로는 한나절 냉장고를 짚고 서 있다고 했다. 누군가 자기를 조종한다는 데. 왜 이런 망상에 시달릴까. 웃음을 잃은 아이. 눈앞 현실 밖에는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다.
아침 햇살이 쫓아오는 길.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긴 그림자를 앞세우거나 끌며 양동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그 누가 함께하는 듯 여겨지는 길. 아름드리 동구나무를 짚고 지난 시간을 더듬어 보았다. 오래된 길이 주는 익숙함들이 조금씩 스며 느긋해졌다. 늦으막한 시간. 일어난 아이들이 마중나와 두리번거린다.
"피곤할텐데, 벌써 일어났냐?"
"해가 중천에 올랐네요."
"아침을 부탁해 놓았다만....."
"그렇찮아도 평상에 차려 두었어요."
"먹고서 저기 언덕쪽으로 동네나 한 바퀴 더 돌고 나가자."
어제가 장날이었는지 차일이 가득 쳐져 있던 경주 중앙시장에서 잔치국수를 먹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집이다. 아이 친구와 나는 맛있게 먹는데 아이는 반 이상을 남겼다.
"맛이 없어서요."
황성공원 옆이 집이라는 일흔 넘은 할머니가 옆에서 넌지시 간섭한다. 노래연습 가는 길에 시간이 남아 점심을 먹는다며. 웃음으로 응대했다.
남산 칠불암에 올랐다. 가파른 산길. 텁텁한 무더위는 푸르른 계곡 안에서도 떨쳐지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치고 오른 산등성이에서 아이는 다리를 절룩거렸다. 얼마 전, 인대가 나가 깁스를 했던 다리이다. 괜찮다기에 그런 줄 알았다가 덧탈이 났을까 염려스러웠는데, 이번엔 반대편 발목 부위가 탁구공처럼 부어올랐다. 아마 성한 다리로 지지하는 중에 힘이 주어져 실핏줄이 터진 듯하다.
"무리 할 것 없이 쉬어라. 내려가 택시부터 부르자. 우선 병원으로 가야지."
"네....!"
"헌데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아빤 저 위쪽 불상을 한번 살펴보고 올게."
어떤 것이 우선일까. 이것저것 따지다보면 끝도 없다. 불상을 그리고 만들어 모시던 천년 전 경주 사람들을 생각했다. 마음에 의지되는 형상을 들이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기우뚱하여 비탈진 내 마음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메마르다. 어젯밤 사람이 그리운 시간에 전화번호를 뒤적였다. 그 누구도 부를 수 없다는 게 슬프다. 때로 피곤하여 무너질 듯한 몸을 간신히 건사했다. 따뜻한 어딘가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은 시각. 문득 아이 마음이 짐작 간다. 누군가 함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 불현듯 그 무언가를 속에 들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