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만에 일어났다. 어질어질하다.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했다. 계약 관계로 찾아간 곳 사장이 오죽 속썩여야지. 들른 횟수만도 스물댓 번을 넘었다. 며칠 전 간신히 성사되었다고 여겼는데, 서류상 빠진 부분이 있다. 재차 일러주고 보내달라고 해도 묵묵부답인 채 이틀이 지난다. 가급적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마음 한 곳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그러기야 하겠어. 스스로를 달래며 전화하는데 인제 받지도 않는다. 웃으며 맞다가도 돌아서면 매몰찬 모습이 되는 게 이상타. 체결되었다고 보고서를 쓰면서도 막상 마무리 되지 못해 가슴이 답답하다. 망설이는 것도 한도가 있지. 다시 찾아갔다. 다행히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맞는데 저으기 위안한다. 마지막 인적사항과 은행 계좌를 받는 순간 허탈감이 든다. 사실은 계좌도 정상이 아니어서 분쟁의 소지가 있지만 시시콜콜히 그걸 따질 수 없다. 인사로 음식이라도 드시고 가라는 걸 다음에 오겠다며 정중히 사양하고 나온 시간이 밤 열한 시가 훨씬 넘었다. 뚝 떨어진 기온과 찬 밤바람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가로등 아래서 별안간 치미는 현깃증. 밤하늘이 노랗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누워 버렸다. 한밤중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일어났다. 몸과 마음이 정상이 아니다.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아 누워 있을 수 없지만 무력감으로 아무런 의욕이 없다.
점심 시간을 훨씬 넘겼지. 며칠째 비몽사몽중인 나를 돌보러 온 아이와 식당에 갔다. 세상 끝에서 돌아온 기분이 이럴까. 어색하다. 자리를 잡는데 뒤따라 들어온 다른 일행이 바로 옆에 앉는다. 음식이 나올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일언반구도 없는 옆자리 일행. 슬쩍 고개를 돌렸다. 대각선으로 보이는 갸름한 얼굴의 여자는 스마트폰에 빠져있다. 맞은편 여성이 어머니인 듯했다. 손주인가. 단잠에 빠진 한두어 살 정도인 아기를 가슴쪽으로 안았는데,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친구라 해도 넘어가겠네. 요즘엔 엄마나 딸이 마치 자매 같아."
헌데 우리가 시킨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옆에서 주문한 고기부터 갖다 놓는다. 제 아비 때문인지 아이가 한 소리 하려는 것을 막았다.
"바쁜 일도 없잖아."
"우웅, 그렇긴 하지만."
숯불 판 위에서 어머니 대신 아이 엄마가 고기를 구웠다. 그러더니 혼자 열심히 먹는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한 점도 안먹는 것을 본 종업원이 우리 식사를 갖고 왔다가 한마디 거든다.
"어머, 아기 내려놓으세요."
"애가 깰까봐서요."
어머니가 목소리를 죽여서 대답한다.
순식간에 고기를 다 먹은 아이 엄마가 자기 어머니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하더니 냉면 한 그릇을 시켰다. 우리가 미처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냉면이 나왔다. 빠르기도 하다. 비빔냉면을 집어 자기 어머니 입에 한 젓가락 맛보게 했을까. 나머지를 후다닥 해치우고는 일어선다. 어머니는 잠든 아이를 보듬어 안은 채 따라 일어선다. 어리둥절하여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이가 혀를 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입 중하다고 여기면서 어떻게 자기 어머니 배 고픈 건 모를까."
나야말로 며칠만에 먹는 음식이어서일까. 우선 찌개가 짜다. 입에 넣으면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누워만 있었더니 허리가 아프다. 다시 적응해야지. 알 수 없는 곳을 떠돌았다. 애매한 기억이지만 어딘가 답이 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을 뿐. 눈에 보이는 게 자기밖에 없을 때에는 어쩔 수 없다. 살면서 차츰 눈이 뜨이는데, 그게 아주 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