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쪽 식당에 들렀다. 흐릿한 불빛과 저녁 나절의 한적함이 어릴 적 사랑채처럼 여겨지는 식당. 할아버지가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풍년초 냄새를 맡은 듯하다. 잘 다려진 삼베적삼 주머니에 손을 꽂은 꾸부정한 당신 모습도 떠올렸다. 주방쪽에서 풍기는 토속 된장 끓이는 냄새에 입맛을 다신다. 한쪽 벽면 아래 한아름도 넘을 통나무 공예가 눈길을 끈다. 받침대에 놓여져 있는 긴 나무 둥치 결이 특이하게도 아래위에서 빨래를 쥐어짜듯 뒤틀려 있어 지난한 생이 담긴 작품이다. 니스를 칠해 두어 매끈한 겉면에 속이 빈, 그래도 묵직한 이걸 어떻게 옮겨왔을까.
"이야, 이것 참 대단하네요."
"저는 그런 걸 보는 게 불편합니다."
감탄하는 일행과 달리 누구는 외면한다. 그래, 같은 사물을 보는 시각도 저리 다를 수 있구나 싶기도 하고, 단호한 표현 강도에 따라 평소 드러내지 않던 성정을 알 듯도 하다. 아아 나는, 이만큼 자란 나무라면 수령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수백년의 생이 축적된 나무를 보며 느끼는 경이로움을 어디에 비견할까. 아니, 나무는 대체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의외로 단풍나무나 자작나무 등은 수령이 백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향나무나 은행나무, 느티나무, 측백나무 등은 천년을 거뜬히 넘겨 산다. 미국에 있는 브리스톨콘파인 중에는 수령이 오천년을 넘긴 것도 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을 그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지구상에서 천년 넘은 나무가 남아 있는 곳은 몇 되지 않는다. 바로 뉴질랜드와 파타고니아, 일본 등 손꼽을 정도인데, 공통점은 이런 곳이 인간이 살기 좋은 장소이다. 태백산에는 천년을 살 수 있다는 주목이 많다. 우리의 정기가 발현된다는 백두대간의 구심점으로 주변에 천 미터가 넘는 연봉이 백여 개 이상 될 뿐 아니라 낙동강과 한강도 시작되는 곳이어서 지정학적으로도 그냥 넘어 갈 수 없다.
명색이 산을 탄다면 정월에는 기필코 올라야 하는 성지. 한해 신수를 위해서라며 전국 산카페 사람들이 일찌감치 몰려들어 이른 시간에도 유일사 아래쪽에서부터 떼밀려 올라간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그 향기로 천년'이라는 주목은 된바람에 기역자로 꺾인 채 자라거나 속이 움푹 패여 시멘트 등으로 보강해 놓기도 했다. 진부 식당에서 보았듯 줄기가 배배 꼬인 채 오르는 등걸을 보며 태생보다 환경이 우선인가 싶어 갸우뚱한다. 부질 없는 바람이었다. 잘 자란 나무를 보며 받던 위안이 결국 나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일이었어. 날이 풀렸다고 해도 칼바람으로 뼛골이 시리다. 눈 쌓인 태백 등줄기에서 가슴을 크게 폈다. 차가운 대기를 폐부 깊숙히 빨아당겼다. 오래도록 견딘 나무처럼 살아남은 한 사내의 생이 그야말로 가당찮아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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