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겨울 지난 소백산

*garden 2017. 3. 28. 07:46





겨울 산행에 쓰인 아이젠, 스패치, 방한장갑과 목도리, 여벌의 기능성 겉옷 등을 꺼냈다. 온갖 장비를 챙겨야 하는 게 늘 불만이었다. 봄이니 가벼운 차림이어야겠지. 가뿐해진 한편에 무언가 빠뜨린 듯한 허전함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겨울을 보냈구나.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해져 찢긴 등산화를 일행이 보았다. 이번 겨울 아이젠을 차거나 바윗길에 부딪쳐 더 너덜너덜해졌다.
"형님, 어케 이 신발을 신고 다니세요."
"오래되어서 편하기도 해. 새로 장만할래도 요즘은 어떤 신발이 좋은지 모르겠고."
"아, 진작 말씀하시지. 이리 따라 오세요."
멀대 같은 후배가 불현듯 되돌아서며 나를 잡아끈다.
"아니, 오늘은 말고. 저기 일행도 기다리는데....."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 신발 이제 버려야겠습니다."
의리 때문인가. 후배가 잘 안다는 등산용품점에서, 사장은 장단을 맞추면서도 떨떠름한 눈치이다. 남는 게 없다나. 할인 가격으로, 신발에 여름 등산바지까지 안아서는 얼떨결에 카드를 긁었다. 그렇게 해서 케케묵은 등산화를 바꾸었다.
"그봐요. 이제 한 십년은 걱정 없이 산을 타시겠습니다."
"이게 목이 높아서 어색한데."
"에이, 금방 익숙해진다니까요. 지금 대세가 그 등산홥니다."
선심 쓰듯 너털웃음 짓는 후배가 행사장 앞 바람 넣은 허수아비처럼 삐죽하다. 그래, 편하게 생각해야지. 아직은 길에서 맞는 바람과 자유가 그리우니 이도 도움될거다.

소백에 간다. 오랜만이다. 대피소를 예약해 놓아 넉넉하게 길을 걷는 일정이다. 비 예보야 애써 무시한다. 가급적 짐을 줄이려고 애써도 카메라에 부식까지 챙긴 바람에 배낭이 부풀어오른다. 청량리에서 무궁화를 탔다. 영주쪽으로 가니 기별이야 해 두자 싶었는데, 제천 정도를 지나는데 손전화가 울린다. 소백산자락길에 매달리는 배용호 전 교육장이다.
"여기 비가 많이 내리는데 어떻게 산을 오르시렵니까?"
"오래 전부터 계획한 일이니, 일행도 있고 예정대로 올라야겠지요. 그나저나 오늘 일정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이구, 그래도 먼 곳서 오시는데....지금 희방사역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오십분 정도 있으면 열차가 도착한다고 하네요."
당신이 추구하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의 자세이겠지만 인정미 돋보이는 어감이 정겹다. 또, 송구스럽다. 괜히 연락을 드렸나 싶기도 하고. 다행히 아침에 집을 나서며 눈에 띄는 술이라도 한 병 들고 왔으니 망정이지. 역에선 우리 일행만 내렸다. 철길 건너 간이유리창 안에 보이는 익숙한 얼굴. 한동안 뵙지 못했지만 여전하여 마음이 놓인다. 일행과 인사를 시키고 이른 점심을 들었다. 굳이 희방사 주차장까지 차로 데려다 주시니 감사했다. 겨우내 얼어붙어 있었겠지. 높이 이십팔미터라는 희방폭포를 오르는 중에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전세낸 듯 호젓한 산길. 웃고 떠들다가도 잊은 듯 침묵에 잠기기도 한다. 지난 겨울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듯 눈 내리는 소리가 아련하다. '일에서 사 밀리미터 정도의 비' 예보는 그마저 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했는데 말짱 거짓이 되었다. 그치지 않는 눈에 발목이 빠질 정도여서, 망설이다가 겨울 장비를 빼놓았는데 일말의 걱정도 인다.
"이것 참, 대설주의보라도 내려야 하는 것 아녀?"
사방이 은백색으로 바뀌어졌다. 예보가 구십 퍼센트의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혹시 모를 십 퍼센트의 사람들을 위한 배려도 있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계획한 일몰과 별자리 관찰, 그리고 일출 산행은 까마득해졌지만 봄으로 가는 길목, 그치지 않는 소백 서설에 갇혀 내일은 길을 나서지도 못할까 하는 어림없는 걱정까지 하며 다들 입가 웃음을 지우지 못한다.

















Roberto Cacciapaglia, Figlia Del Cielo III







'不平則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봄날  (0) 2017.04.18
강촌 봄  (0) 2017.04.11
조령산 하늘 길  (0) 2017.03.22
겨울 끝 춘천 용화산  (0) 2017.03.21
용암이 넘쳐흐르던 땅 위를   (0) 2017.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