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꼍으로 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른 아침 응달을 떠도는 감미로운 향기. 버리려고 들고 간 음식물 쓰레기 물기에 조바심하던 마음일랑 지우고 무방비 상태로 두리번거렸다. 아파트 담장 아래 아기 솜방망이처럼 꽃대를 쳐든 미쓰김라일락 한 그루가 대견하다. 그 옆 꽃잎을 떨군 벚나무에 열매가 조롱조롱한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세월을 보냈구나. 그저께 산에서는 자욱한 연무 속에 송홧가루 잔뜩 머금은 소나무를 보았다. 바람 부는 때를 어떻게 눈치챘을까. 풍매를 위해 꽃가루를 덧칠한 슬기에 새삼 감탄했다.
아침에 쑥버무리를 장만해 와 권하는 손을 고맙게 쳐다보았다.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리는 입하는 신록을 부르는 절기. 이맘때면 농사일도 분망해진다. 입하때 꽃 핀다는 이팝나무는 이십여 일 정도 하얀 꽃 이파리가 무성하다. 꽃이 곱게 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이라고 했다. 꽃이 마치 쌀밥을 담아 놓은것 같다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흰눈이 내린 것 같다고 해서 눈꽃나무(snow flowering)라 한다.
어릴 적 집에 우리뿐인 적이 있었다. 끼니때가 훨씬 넘었다. 어디를 다니러 가셨는지 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다 지쳐 찬장을 뒤졌다. 그날따라 먹거리가 하나도 없다. 실망감에 주저앉았다. 징징대는 동생들을 달랜다. 쌀독을 열었다. 그리고 냄비에 쌀을 앉히고 밥을 한다. 어머니가 아시면 어림 없을 이야기지만 보리쌀을 섞지 않은 쌀만으로 이밥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입맛을 다시며 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뜨거운 냄비를 연탄불에서 꺼내다가 엎어 버렸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이만큼 아찔했을까. 냄비를 바로하며 부엌 바닥에 흩어진 밥을 본다. 이보다 귀한 게 어디 있어. 허겁지겁 달려들어 김 서린 밥을 챙겼다. 우리는 혓바닥을 굴려 골라내며 흙 묻은 밥알을 씹고 또 씹었는데, 아마 이 무렵이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