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면서도 떠나는 연습을 했나 보다. 두시를 훨씬 넘겨 잠자리에 들었다. 알람을 네시 반에 맞춰 놓았는데, 이십분 전 저절로 일어났다. 세면 중에 김 서린 거울을 닦았다. 머릿속 와글거리는 김은 어떻게 지울까. 갈래진 생각이 산지사방 가지를 벋어 정신 없다. 참, 일박이일 여정이었지. 챙겨야 할 게 뭐더라.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자 배낭이 빵빵하게 부풀어올랐다. 새벽 바람이 의외로 차갑다. 몸은 뜨거운데 한기를 금방 느꼈다. 소방관들이 모래주머니를 이고들고 십여층을 오르내리는 시합을 한다고 했다. 거기 나설 것처럼 지하철 역까지 냅다 뛰었다. 배낭이 떨꺽거린다. 헉헉대는 중 도착한 전동차. 새벽녘인데도 사람이 많다. 올라서도 쿵푸 고수처럼 손잡이에 매달려 있었다. 앞 좌석에 앉아 자던 이가 반눈을 뜨고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창 밖으로 열린 새벽 한강을 내다보았다. 고층빌딩 사이를 가로질러 내려오는 유장한 강. 도시가 잠잠하다. 이건 가식이다. 여기서 보면 아무렇지 않아도 속은 절대 그렇지 않다. 서울역에서 KTX로 대전까지 내려가기. 택시로 대전 복합터미널까지 가서 장계행 시외버스 타기. 버스에서 내리자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할머니들이 참새떼처럼 입을 오물거린다.
"산에 가우?"
"네."
'뭔 산?"
"덕유산으로 갈 겁니다."
"덕우산? 거기 좋아!"
"하하, 네....."
"후딱 갔다 와불쇼잉."
"감사합니다!"
젊은 축이 눈에 띄지 않는 세상이다. 누군가 옆에서 소리를 마구 질렀다. 싸우는가 했더니 일상대화가 그렇다. 장계에서 다시 택시로 백두대간 육십령으로 가기. 장계면은 웬간한 읍보다 크다고 했다. 택시 기사가 장계로터리를 설명한다. 대구로 가는 길, 전주, 광주로 가는 길, 진주로 가는 길 방향이 갈라진다고. 육십령에서 배낭을 추슬렀다. 여기서 시작한 산행이 구천동에서 끝난다고 해서 육구산행이라 부른다. 도상거리도 만만찮다. 아무래도 턱을 오르내리거나 바위 구간도 밟고 오르내리므로 실제 거리는 훨씬 길거야. 체력 안배와 준비해 온 것들을 상쇄시키며 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궁리한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쫓아왔지만 실상으로 돌아가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상의 중심이던 나를 온전히 끌고가긴 힘들어. 자연 앞에서 한갓 풀뿌리처럼 미미한 존재인 나를 깨달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한 구간 한 등성이를 밟고 넘어설 때마다 엎어진 나를 팽개치고 뿌리치며 새로운 나를 만나 환해지고 밝아진 경험이 언제였던가. 무심코 지나버린 봄의 흔적을 뒤졌다. 진달래 종류도 제법 된다. 잎과 꽃이 함께 나고, 잎에 털이 있다는 털진달래 외에도 흰진달래, 왕진달래, 반들진달래, 한라산진달래 등이 있다. 유난히 붉은 꽃잎이 손짓하듯 도드라진 색깔을 보이는 털진달래. 흔들리는 저 꽃은 그야말로 두견새가 울어 피를 토한 자리에서 돋았을거야. 암릉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본다.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바람이 소용돌이친다. 저희들끼리 몰려다니는 소리가 우레처럼 우르릉댄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이니. 맑고 뜨겁던 해가 가려지고, 난데없는 비가 뿌리기도 한다. 끝없이 내려갔다가 지칠 때까지 오르는 일도 덧없다. 지나온 연봉을 꿈꾸듯 돌아본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봉우리를 넘어야 할까. 어느 때 너를 깊이 들였다. 그러면 될 줄 알았는데, 해가 바뀔 때마다 달이 비출 때마다 그늘진 기억을 어떻게 지우고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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