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산에 함께 가는 친구 G.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G는 유난스럽다. 때가 되면 최면을 걸듯 이른다. 보약을 챙겨 먹을 시기라며, 두툼한 입술을 실룩거리며 입맛을 다신다. 어느 때 집식구가 미처 챙기지 못하기에 화를 마구 냈다고 한다. 반농담삼아 지나쳐 듣다가 심각한 표정을 보고 대꾸할 말을 놓쳤다. 보약이라고는 입에 대본 적 없으니 이해 못하는 부분이다. G가 산에 올 때면 즐기는 먹거리를 미련할 만큼 챙겨온다. 대체로 행동식만 가져가는 나는, 덕분에 이것저것 골고루 얻어 먹게 되니 좋기도 하지만 식성이 절제되어 있어서 유감이다.
순한 사람이 나이 들면 완고해지는 걸까. 더듬거리면서도 말이 많은데 이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수단이다. 현실인지 능력이 떨어지는지 오직 정한 길만 좇는다. 비가 올 듯해 단축코스를 넌지시 일러도 듣지 않는다. 염려스러워 얘기한들 콧방귀만 뀐다. 결국 우리는 G의 고집에 따라 예정한 대로 산을 타야 했다. 100대 명산을 모조리 탈 듯 휴일이면 산에 가자며 배낭을 꾸린다. 단풍철 길이 오죽 밀려야지. 가까운 곳을 다녀오자고 해도 단칼에 자른다.
"가을엔 내장산 단풍 만한 데가 없어. 거기로 가자구."
강원도 정선 두위봉 아래 간 적이 있다. 시간이 남아 한나절 오르자고 해도 고개를 흔든다. 자기는 '다녀왔다'면서. 굳이 안가 본 다른 산을 가야겠다고 우기니 방법이 없다. 어느 때 여러 친구가 몰려가서 산 중턱쯤 주저앉은 적 있다. 산을 잘 오르지 않는 친구도 있어 그만 올라가자고 만류한다.
"이만큼 올라왔으면 되지. 더 이상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쉬고 내려가지."
거기 동조해 너도나도 자리를 펴고 술판을 벌였다. 헌데 G만은 못마땅하다.
"아, 산에 왔으면 그래도 정상을 밟아야지."
그날 친구들과 동떨어져 G 혼자 정상을 밟고 왔다.
언제 적이던가. 순식간에 몸무게가 늘었다. 쉽게 체형이 바뀌지 않는데 어디가 잘못된 걸까. 나날이 살이 쪄 활동이 버겁다. 이것저것 궁리할 것도 없이 주말이나 휴일이면 산에 달려갔다. 그해 지방쪽 산에 다녀온 걸 제외하고서도 육십여 회나 북한산을 올랐다고, 함께 다니는 친구가 기록해 놓은 것을 보았다.
이번엔 오랜만에 설악 공룡능선에 가야지. 산행을 계획하다가 '내가 설악산에 몇번 갔을까' 하고 더듬어 보았다. 학창시절부터 산행 목적만으로 설악 언저리를 헤맨 기억을 점검한다. 긴가민가하는 부분을 제외해도 일백이십여 회쯤 되는 듯하다.
누군가 산행중에 말을 건다.
"우리 나라 산이란 산은 샅샅이 다녔겠어요."
고개를 흔들었다. 기록을 위하거나 발도장을 찍으려고 산에 오르지는 않는다. 산을 벗삼아 행복한 느낌이라도 지니려고 하였다. 숲과 나무와 꽃과 바위를 보며 느끼는 기쁨이 얼마만큼인가. 각설하면 산에서 온전한 나를 찾고 싶었다. 호젓한 곳에서 느끼는 교감. 스스로 맑아지는 기분을 누리려고 묵묵히 걷고 올랐다. 어렴풋이 살아온 시간과 느낌을 조금씩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 어디서라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공룡능선을 기화로 훌쩍 날아다니고 싶다면. 몸이 가벼워져 깃털처럼 바람따라 떠다닐 수 있어 안데스에도 가고, 힌두쿠시 산맥 깊은 곳 어딘가에 나를 갖다 놓을지도 모르는 일.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 어떠랴. 산 그늘뿐인 적막강산에서 홀로 절대고독을 맞더라도 기꺼이 껴안으리라. 백만년 뒤에라도 그곳 얼음장 아래서 기꺼이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고 기억하시기를!
Disturbed, The Sounds of Sil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