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안춥겠지요?"
"네?"
"이제 봄이지 않나요!"
"아, 네."
모임에 갔다. 의식하지 않고 빈 자리에 앉았더니 생판 모르는 얼굴뿐이다. 아니, 지정된 좌석이 아니니 다들 그렇지 않을까. 앉아있는 내게 말을 거는 이. 무료해서이겠지. 헌데 이이는 누굴까. 말이 어눌하다. 못알아들은 건 내탓이 아닐거야. 혹시 자격지심을 느끼는 건 아닐까? 그래서 주제 넘게 거든다.
"어쩌면 한번쯤 꽃샘추위가 오지 않을까요?"
헌데 갸웃거린다. 손가락으로 자기 귀를 가리킨다.
"가는귀가 먹어서 안들리니 다시 말해 주세요."
이런, 아무래도 잘 못 앉았어. 대꾸하지 말걸. 후회를 억누르며 되풀이한다.
"꽃샘추위를 한번 거쳐야 봄이 올겁니다."
"아, 꽃샘추위. 맞아. 그래야 봄이 올거야."
말을 하고도 걱정이다. 꽃샘추위가 없으면 어떡하지. 찾아와 따지면 방법이 없다. 다행일까.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쌀쌀해졌다. 어제 한낮 화톳불 같은 그 봄볕이 흔적 없다. 종잡을 수 없이 오르내리는 기온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한가 보다.
할인마트에 들렀다. 여느날과 달리 북적인다. 산 물건을 들고 계산대 앞에서 줄 서 기다렸다. 앞 여자는 당근과 토마토만 계산대에 올렸다. 각각 서너 팩씩이나 마련하다니. 식구들은 두말없이 꾸역꾸역 먹어야 할거다. 허긴 나도 술만 샀다. 술병만 올려두는 내가 더 이상하게 보일까. 일주일치 분량이다. 경험상 이틀을 넘기지 못할거야. 내 뒤 젊은 남자를 돌아본다. 인스턴트 음식에 과자 봉지만 가득한 카트를 밀고 왔다.
묵직하던 겨울, 비로소 털어버린 듯하다. 이른 아침부터 커다란 벚나무 아래서 팝콘을 튀기는 부부. 달콤한 버터 냄새를 몽글몽글 풍긴다. 지나는 사람들 콧구멍이 벌룸거린다. 나무마다 몸을 흔들었다. 부풀어오르는 팝콘처럼 벚나무 꽃망울이 커진다. 봄이 오긴 오나 보다. 데인 듯 가슴이 화끈하다. 햇살이 비친다. 나른한 봄 기운이 퍼져 기지개를 켠다. 조금 전 영등포 고가를 지날 때 시작된 'Ravel'의 음악이 소음에 묻혔다. 차가 밀려있는 곳을 벗어나려고 자동차 속도를 높이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공사로 덮어둔 철판 위를 구르는 둔탁한 타이어 소리. 그래도 알고 있는 선율을 떠올리며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간결 명료하며 집요하게 십팔회나 되풀이되는 주제가 이어지는 'Bolero'. 익숙한 누군가를 만난 듯한데 낯선 건 웬일인가. 장소가 마땅찮아서일거야. Paul Jackson Pollock의 그림 한 점 정도 걸린 봄볕 노니는 거실에서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때 전세계 대도시들에서 한날한시에 연주하던 감동이 떠올랐다. 음악을 되새기는 동안 점차 피가 끓어올랐다. 비늘이 돋듯 온몸이 간질거린다. 운전석에 앉은 채 소리를 질렀다. 사그라져 버려 잊은 정열이 꽃으로 피어나 내내 마음에 머물렀다.
'Igor Stravinsky'가 '스위스 시계기사'라 불렀던 'Joseph Maurice Ravel'. 이는 정밀하고 잘 설계되어 정확히 만들어진 Ravel의 음악적 특징을 표현한 말이다. 또 다르게 Ravel을 오케스트라의 마술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근대 프랑스 작곡가 중에서 오케스트라 악기 사용 기량이 뛰어난 작곡가였다. 무소르그스키(Моде́ст Петро́вич Му́соргский)의 조곡 '전람회의 그림'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하여 이름을 떨쳤고, 스페인 랩소디(Rapsodie espagnole), 무용모음곡 마 메르 루아(Ma Mere L'Oye),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발레 모음곡 다프니스와 클로에(Δάφνις καὶ Χλόη) 등이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Ravel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곡은 뭐니뭐니해도 'Bolero'이다. 1927∼28년에 미국 연주 여행 후에 작곡하였고, 1928년 파리 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된 다음 발레영화로도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