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소백 숨

*garden 2018. 2. 14. 02:30




오랜만에 식구들이 밥상에 앉았다. 식사 중에 웃고 재잘거렸다. 웬일일까. 미용실을 다녀온듯 젊어진 모습의 어머니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환한 웃음을 보였다. 문간을 서성이는 아버지께 용돈이라도 드리려고 주머니를 뒤적이는데 푼돈만 나온다. 그래도 챙기시는 모습에 저으기 안심된다. 출근하려고 서둘렀다. 헌데 막상 나가다 보면 뭔가 빠뜨려선 다시 들어온다. 아침 시간에 왜 이리 쫓길까. 허겁지겁 쫓아나간 정류장에서 뜸하게 내리는 빗방울을 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던 아는 얼굴이 내게 익숙한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어제일처럼 생생한 꿈이라니. 잠든 지 한 시간이나 되었을까. 어둠 속을 내달리는 희미한 자동차 소리를 들었다. 눈을 감아도 말똥말똥해진다. 이것 참, 잠들기는 틀렸어. 새벽 일찍 나가야 한다. 아직 서너 시간은 지나야 하는데. 일어났다. 배낭에 넣은 짐을 꺼내 다시 챙겼다. 얼마 전 아이들이 온 바람에 새벽 네다섯시까지 술잔을 기울이다가 약속을 깜박 놓친 적이 있다. 그게 여지껏 걸린다.

중첩된 산 그림자 속으로 스며든 길. 저 길을 줄기차게 오르면 비로봉으로 통한다. 쌓인 눈밭과 메마른 바람을 헤치며, 얼기설기 팔을 벋어 손잡은 나무들과 굳건한 바위를 찾아봐야지. 작정하고 나선 참이다. 산을 머릿속에 그렸다. 숨을 깊이 들이쉬자 싸아한 냉기가 폐부에 들이찬다. 걸음을 옮기다가 근방에 폭포가 있는 것을 기억해냈다. 어느 여름날, 이곳을 지나던 중 느끼던 청량한 기운과 물소리는 아예 감감하다. 한구비 돌아간 일행이 멈추었다. 사람들이 겉옷을 벗었다. 중턱쯤에 오르자 차가운 물기가 맨살에 닿았다. 어느새 구름이 들이찼을까. 눈비가 흩뿌린다. 거센 바람을 피해 아름드리 주목 아래 모였을 때 이번에는 너도나도 옷을 꺼내 입었다. 변화무쌍한 날씨만큼 사람들도 자주 옷을 바꿔 입었다. 앞뒤로 움직이는 일행들 옷 색깔이 초록에서 흰색으로 바뀌기도 하고, 붉은 계통에서 검은색으로 바뀌기도 해서 어리둥절했다. 눈만 드러내 놓고 온통 싸맨 바람에 뒤섞이면 알아보기 힘들겠어. 눈비가 차츰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한기 속에 나앉을 수 없지. 주목 감시초소는 한겨울 즐겨찾는 요긴한 식당이다. 요기를 간단히 할 참인데, 발 디딜 틈 없이 들이차 있는 사람들. 그래도 난장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다행히 엉덩이를 들이밀자 그만큼 공간이 생겼다. 일행이 흩어져도 할 수 없다. 갈증이라도 풀어야지. 술을 꺼낸다. 도상거리가 제법 되어 행동식만으로 하자고 했어도 일행들이 이것저것 건네는 바람에 허겁지겁 먹는다. 마침 옆에 버너를 켠 팀이 있다. 양해를 구하고는 카메라 렌즈를 녹였다. 하늘로 가는 완만한 데크길. 몰아치는 바람이 버겁다. 앞에 가던 이가 비칠비칠 밀리다가 나딩굴었다. 산정이 운무에 덮였다가는 걷히기도 한다. 손수건이 날려 주우러 쫓아갔더니 데크 옆 눈밭은 무릎까지 빠졌다. 구름이 옅어져 사방이 열렸다. 조아린 연봉들이 물결처럼 밀려난다. 비로봉에서 우리는 국망봉으로 가야 한다. 사람들마다 한움큼씩의 입김을 달고 움직였다. 선머슴아 더벅머리처럼 나무들이 까칠한 산꼭대기마다 매몰찬 겨울이 무시무시한 자태로 활개쳤다.

그래도 소백은 대체로 부드럽다. 능선은 완만하여 안에 들면 편안하다. 여기서 떠올리는 삶과 죽음은 의미 없다. 숨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본다. 누군가는 다시 태어나듯 잠에서 깨고, 또 다른 이는 잠들듯 죽었다.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른 이 계절. 잠자듯 겨울은 사그라들고, 갓난 아이 걸음마처럼 봄이 시작될게다. 낯선 사무실 문 앞에 선 것처럼 손잡이를 잡고 숨을 가다듬었다. 고치령쪽으로 가다가 늦은맥이재에서 율전으로 내려간다. 마지막 겨울일는지도 모른다. 무릎이 빠지도록 걸어도 괜찮아. 혼자이면 어떤가. 냉기에도 곧 익숙해질 것이다. 바람이 덮어 쓰다듬어 줄테지. 그렇게 이만년인들 견디지 못할까.
































El Bosco, Nirvana(영화 'Millions' 엔딩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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