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대 정상 바닥 표식, 염초 릿지길, 만경대, 인수봉 정상, 사면, 인수봉 너머 도봉산
산성입구이다. 버스에서 내린 시각이 열시 오십분. 늦어도 괜찮다. 홀로산행이므로 느긋해야지. 평일 아무도 없는 길. 산오리나무 씨앗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상수리, 졸참, 신갈나무 잎이 지천에 쌓인 곳. 산은 적막강산이다. 우리가 휴일일 때 산은 성시고, 우리가 일에 빠져있을 때 산은 휴일이다. 작정한 건 아닌데 차츰 걸음이 빨라진다. 가급적이면 빡세게 걸어야지. 보리사를 감아 돈 다음 개연폭포, 대동사를 지나 연이은 오르막을 쳤다. 안내판이 나오면 잠깐 서서 숨 고르며 읽을까. 쉬는 시간 없이 한발한발 꾸역꾸역 올랐다. 가파른 길을 지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장딴지 근육이 뻐근하다. 저 멀리 장벽처럼 서있던 바위가 눈앞에 다가왔다. 흐린 듯하다가도 구름 사이에서 숨바꼭질 하는 해. 날이 푸근한가. 은연중 배어난 땀이 제법 흘렀다. 이삼 일 전까지만 해도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길이었잖은가. 극과 극을 치닫는 날씨라니, 어리둥절하다. 헐떡이는 소리가 들린다. 멀쑥한 사내 하나가 배낭도 없이 나타나 앞지른다. 백운봉암문 아래쪽까지 가는데, 본 사람이 채 열 손가락에 잡히지 않았다.
정각 열두시 전에 암문에 도착했다. 제법 먼 거리라고 여겼는데, 겨우 한 시간 남짓에 닿았다. 호연지기가 일어서일까. 누군가 산정에서 소리를 지른다. 혀를 찼다. 철딱서니가 옆에 있다면 한소리 해주고 싶다만. 웅성대는 소리가 무언가 했더니 '낙석위험'에 대한 안내방송이 되풀이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백운대쪽 암릉 벽이 조각나 간신히 매달려 있는 곳이 눈으로 보아도 몇 군데이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갈증이라도 지우려고 갖고 온 막걸리 병을 꺼냈더니 네맛도 내맛도 없다. 혼자라는 게 좋은 점도 있지만 이런 때엔 싫다. 운무 지나는 백운대쪽을 본다. 망설이고 있었더니, 맑고 고운 음성이 일깨운다. 백운산장쪽에서 올라온 여자가 말을 붙인다. 산장에 '상중'이라고 붙여져 있어서 걱정이라며 쓰고 온 고글을 만지작거린다. 내가 알 수 있나. 나중 쫓아온 누군가 거들었다. 거기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이 운명했다면서. 캣맘인가. 백운대쪽 고양이를 보러 왔다는데. 산장에 매인 개에게 고양이 먹이를 온통 주고 왔다면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어떻든 평일 적적했나 보다. 함께 오르자며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데, 무심코 지나칠 장사 없다. 산성입구에서 올라온 방향으로는 계곡 얼음 말고 겨울 기미조차 없었는데, 빙판이어서 아이젠을 착용했다. 예정에 없는 백운대에 올랐다. 아무도 없는 세상, 뿌연 미세먼지 사이로 앞이 열렸다. 시간 나면 대중없이 이곳을 찾던 옛날이 되살아났다.
거치적거려 아이젠을 벗었다. 대동문에서 아카데미하우스쪽으로 내려오는 가파른 산길. 반대편과 달리 눈과 얼음이 잔뜩 덮여있다. 구간이 위험하면 아이젠을 착용해야겠지만 번잡스럽다. 대신 잘 쓰지 않는 스틱을 짚으며 거북처럼 걸었다. 가끔 아찔한 경험을 한다. 조심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눈도 흐릿하다. 이를 악물고서는 막무가내로 내려오다가 뚝 떨어진 암릉에서 발 놓을 곳이 마땅찮다. 얼음판 위 디딘 발이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아차!' 하는 순간 몸이 틀어졌다. 시작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기우뚱한다. 왼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오른쪽 계곡으로 떨어졌다. 아무렴, 인제 죽어도 호상이지 않을까. 농담처럼 내뱉던 말을 떠올렸다. 머리가 바위에 부딪치고 한바퀴 돌면서 배낭이 받혀졌다가 다시 떨어졌다. 웃어야지, 여유를 가지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다. 손짚고 앞돌기하듯 걷잡을 수 없다. 다시 한바퀴 돌았을 때 겨드랑이 사이에 무언가 걸렸다. 쓰러진 나무가 구세주처럼 나를 거두었다. 삼 미터 정도의 내가 서있던 산길을 올려다 보았다. 계곡 아래가 캄캄하다. 중심 잡고 일어나 내팽개쳐진 스틱을 찾았다. 다행히 상처는 없다. 부닥친 머리 부위를 꾹꾹 눌러 통증을 가늠한다. 얼음으로 뒤덮인 비탈을 손으로 더듬자 차가움이 섬뜩하다. 흩뜨러진 정신을 수습하며 간신히 올라왔다. 하산하는 내내 산길 오르는 이를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