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광장에서 시작한 걸음. 작정한 바 있어 그치지 않았다. 잰걸음 사품에 몸이 후끈하다. 가파른 길. 바위를 잡고 용틀임도 하고, 기를 쓰며 차고올라 비로소 마주한 우람한 암장. 여기가 은석암인가. 도봉을 우르를 때면 멀리서도 이곳부터 찾지 않았던가. 차츰 익숙해진다. 거칠고 투박한 바닥이지만 괜찮다. 경사진 면을 건너가 안기듯 누웠다. 우리 오랜만이지 않느냐? 햇빛이 강렬하다. 일억 오천만 킬로미터 우주를 건너온 자양분 소산. 눈뜨기 힘들어도 기꺼이 맞아야지. 텁텁한 계곡을 오르느라 땀에 흠뻑 젖은 등짝. 몸을 뒤집었다. 뜨거운 볕에 김이 오른다. 가뭇한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 때 가슴에 품은 꽃씨가 있었을텐데. 싹 틔우지 못한 채 말라 비틀어져 버렸을까. 맞아, 그때 꿈도 뒤틀어진 게 아닐까. 달아오른 바위도 제법 뜨겁다. 뺨을 대고 있다가 데일 뻔했다. 일어나 숨을 고른다. 다른 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지난 순간이 아득하다. 억겁을 지난 것 같으니.
평일이어서 한적한 도봉. 다시 꽃이라도 피우려면 서둘러야지. 어설픈 시절, 아찔하던 뜀바위를 건너 포대능선까지 단번에 올랐다. 이깟 찜통더위쯤이야. 그래도 바위그늘에서 거친 숨을 내뿜었다. 이런 나를 누군가 본다면 혀라도 차지 않을까. 바람도 없다. 한눈에 보이는 건너편 수락 봉우리. 무더위에 짓눌린 장암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그렸다. 건너뛰면 넘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아. 새하얗게 빛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오밀조밀한 길을 따라가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신선대로 가는 길처럼 가닥이 어지럽다. 수없이 오갔어도 낯선 건 왜인가. 나중 우이암으로 돌아내려가거나 송추계곡으로 떨어지는 길을 어림한다. 한나절이면 충분했던 길이 힘겹다.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일 때에는 우스갯거리였던 코스. 여름 숲에서 명멸하는 꽃을 더듬는다. 다리가 후덜거린다. 장딴지를 만졌다. 다 때가 있으리니. 지난 날이 희미해 눈을 끔벅였다. 세월 속 이운 꽃 모습이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