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속 여름, 너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여름이어도 물을 끓였다. 급하게 소용될 일이 생기겠지. 씻은 보온병을 엎어두었다가 넘어뜨렸다. 잠이 덜깬 탓이야. 요란한 소리에도 다행히 탈 없다. 그래도 꼼꼼하게 점검했다. 비상식량에 행동식, 코펠과 버너 등을 쟁여 넣은 배낭을 들어본다. 전에 없던 부피와 중량을 느꼈다. 거기에 카메라나 배터리 등 기기, 우의와 여벌 옷도 넣어야 한다. 빠뜨린 것은 없을까. 흘깃 본 시각이, 강가에 애써 쌓은 모래성처럼 덧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서둘렀다.
모이는 장소가 멀다. 이 도시 저 끝까지 가야 하니. 혼자 움직이는 것과 달리 맞춰야 하는 이 과정이 싫다. 약속한 다음 '아차!' 했지만 별 수 없다. 무심코 횡단보도를 건넜다. 멀뚱거리며 머물다가는 다시 되돌아왔다. 십여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 툴툴거려봤자 소용없다. 이른 시각이어서인가. 택시를 잡자. 그렇게 쫓아간 동서울터미널에서 일행과 만났다. 인천이나 부평에서, 경기도 광주에서 점으로 존재하던 이들이 한데 모였다. 단톡방에서 한여름 말매미처럼 와글와글대더니 태풍 소식에 휘둘려 너도나도 꼬리를 내려 조촐하다.
숲그늘에서 흔들리는 꽃이 애처롭다. 채 피지 못한 꽃도 눈에 띈다. 카메라 앵글을 맞추기 전에도 꽃이던 존재들. 벌레에게 꽃잎을 뜯어 먹혀 일그러진 모습이어도 꽃이기를 포기할 수 없는 환한 꿈. 태풍 탓인가. 한신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 맹렬하던 무더위가 흔적 없다. 종일 구름이 바쁘다. 한며칠 비로 풍성한 계곡수가 위안이다. 맛있는 밥을 짓겠다고 일행 중 누군가 밥솥을 안겨주는 바람에 짐이 늘었다. 안에 씻어둔 쌀이라든지 잰 고기 등도 있다. 생각이야 좋지만 제대로 펴놓고 먹을 수는 있을까. 태풍에 대피소에서 사람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예약이 무용지물이다. 만나는 이들마다 쫓겨나 내려왔다면서 아우성이다. 우리야 오래 전부터 계획한 산행이니 어설피 포기하기에는 그야말로 아깝다. 대피소라는 개념이 무어냐? 면서 설파하는 일행도 있다. 우겨서라도 오늘 밤 거기 자겠다면서 잰걸음을 서두른다. 그 바람에 몇 되지 않는 일행이 세 갈래로 갈라져 대면도 할 수 없다. 7부능선 쯤에서 오르내리며 일행을 모았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나른하다. 오를 수 있는 데까진 가 봐야지. 다음은 닥쳐서 판단한다. 일행을 북돋우며 짐을 챙겨 들었다. 억센 계곡 물소리를 거슬러 올라간다.
고단해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생각이 갈래쳐 지리산을 안방처럼 휘젓다가 이적지까지 걸어온 길을 복기하기도 한다. 건반을 두드리듯 빗소리가 요란스러웠다가 멀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까무룩한다.
똬리를 틀고 맴돌며 높이 솟구치는 저기가 태풍의 눈이지. 고요한 그곳까지만 가자. 꽃잎이 나부낀다. 풀이 눕고 숲이 흔들렸다. 습기에 젖은 초록냄새가 진동한다. 바람이 모질게 '윙윙'거리는 속을 위태롭게 걸었다. 행여 자세가 흩뜨러지지 않도록 몸을 가누었다. 등 뒤 배낭이 들썩인다. 참아야 해. 이 순간만 넘어서면 괜찮아지리라 여기면서. 젖은 바짓단이 걸리적거려도 우의가 찢어져도 어쩔 수 없다. 머릿속에서 선을 그을 땐 간단했다. 여긴 가까운 거리인듯 여겨도 기실 가뭇한 걸 알아챈다. 발을 띄워 훨훨 날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사방을 휘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우쭐거리는 우리. 이도 좋은 춤사위이지 않을까. 민낯에 들이치는 빗물을 훔치며 이를 악문다. 손에 쥔 이정표가 너덜거려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비에 젖어 체념해 버리자 거추장스럽던 몸이 오히려 홀가분해진다. 어깨에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난데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동생이다.
"이 날씨에 정말 산행하는 거에요?"
"그럼!"
깜깜한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내색 않으려는, 나는 또 누구인가.
Menuet in E Flat Major , Andantino Allegret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