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감기. 심술쟁이처럼 군다. 며칠 전 함께한 이에게서 톡이 왔다.
'감기 좀 어떠신가요?'
'이제 괜찮네요.'
'그럼 통화 좀 합시다!'
자판에서 손을 떼기도 전에 전화가 와 지체 없이 받았다. 두어 마디 주고받았을까.
"어쩐 일이십니까? 성님.....쿨럭!"
"감기가 아직 안떨어졌네!"
"그게 조금 전까지도.....쿨럭쿨럭!"
"아무래도 얼른 병원에 가봐요."
"그렇.....쿨럭.....찮아도.....쿨럭"
얘기를 채 잇지 못하고 부랴부랴 상대가 통화를 끊었다. 웅, 이 사람은 뭣 때문에 전화를 했을까. 남은 기침을 갈무리하며 의아하다. 허나 명확하다. 당분간 누구도 만날 수 없다. 대화나 얘기를 온전히 진행할 수 있어야지.
열흘이 지나도 그대로인 기침. 낮엔 비교적 견딜 수 있다가도 부교감신경이 지배하는 밤엔 심했다. 병원에 들러야겠다고 작정하기를 몇 번. 그때마다 발목 잡는 다른 일로 행선지를 틀곤 했다. 두어 주일 지나자 인제 내가 아닌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버틸 수 없다. 밤에 공허한 기침을 늑대 울음처럼 어둠 속으로 쉬지 않고 보냈다. 이건 고역이야.
공항에 다녀오는 길이지. 내과가 보여 차를 세웠다. '이런 촌구석에?'하며 간단하게 여겼는데, '제에길!', 만만치 않다. 물경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더구나 나와 이름이 비슷한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는 데도 냉큼 대답하며 몇 번이나 앞서 쫓아갔다. 간호사가 손을 흔들며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아니, 아버님이오!' 하면서 두리번거리는데, 나 참!
S대 출신 내과 동문이라는 의사는 덩치가 물경 일백킬로는 거뜬할 걸. 머리 크기가 남녘 돌담 위 늦가을에도 안따고 있던 부푼 늙은 호박도 갖다 댈 수 없을거야. 그것도 멋이라고! 앞머리를 여자 단발처럼 하고서는 옆머리를 땋아서는 두른 다음 뒷꽁지머리와 어울리게 해 놓았는데, 처음에는 보기 이상터니 그것도 일면 패션헤어였다.
"가래와 콧물 없이 기침뿐이라구요?"
"네!"
"손바닥을 한번 펴 봐주세요."
의사가 커다란 손으로 내 손바닥을 쓰다듬는다.
"네에, 좋습니다. 이번에는 혀를 길게 내보세요."
눈꺼풀도 양쪽 다 까뒤집어 보고, 목 안 편도선도 확인하고, 귀 안 체온도 측정터니 이마도 짚는다. 저 덩치가 이리도 날렵했나? 발을 굴러 바퀴의자를 성큼 밀어서는 내 뒤에 위치한다.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겉옷과 셔츠를 걷어 등을 이리저리 짚었다. 차가운 감촉, 청진기인가.
"숨을 크게 쉬어 보세요!"
"......"
"이제 크게 내뿜으시고!"
"다시 쉬어 보세요."
"흐~읍!"
"숨을 내뿜으시고, 네에 좋습니다!"
다시 의사가 날렵하게 내 앞으로 돌아온다. 표정이 장난스러워 웃을 뻔했다.
"어떻습니까?"
"아버님, 다행히도 아무렇지 않네요. 대신 약을 지어 드릴게요!"
"조금 오래된 바람에. 주사도 한대 놓아 주세요!"
"안됩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감기가 끝물이네요. 물론 한 이 주 고생하신 건 알지만 폐도 괜찮고 편도선도 좋네요. 열도 전혀 없으니."
덩치 큰 의사가 안경 너머 눈을 일부러 부라리더니 열 감지기를 내 이마에 쪼여 재차 확인한다.
"대신 기침이 나면 먹을 수 있는 물약을 듬뿍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의도적인지 고개를 젖히고 큰 웃음을 짓더니 눈을 찡긋한다. 이건 무슨 신호야, 가라는 거야? 영문 모르고 일어섰다.
"끝났습니까?"
"네에, 네!"
밤이면 밤마다 기침과 씨름했다. 두어 번 약국에서 약을 받아 오며 이내 감기를 떨쳐 버리리라 여겼는데, 여의치 않았다. 약발이 잘 받는 것도 나이가 들면 아닌가 보다. 대신 두툼한 약 봉투를 쥐고서는 이제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감기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어본다.
후각이 극도로 민감한 상태이다. 엘리베이터 십층에서 탄 여자는 향수를 왜 이리 역하도록 뿌렸을까. 다음 육층에서 탄 여자 화장품 냄새는 익숙하다. 이건 우리 식구가 즐겨쓰던 거여서일거야. 비 온 다음 날 아침, 눈물처럼 잎을 내쏟고 있는 은행나무를 보았다. 처절하여 잠시 눈을 감았다. 내게 자양분을 만들어 주던 잎을 저렇게 내쳐야 하는 가을이라니. 길 옆에 나란한 가로수. 똑같은 종류의 가로수 중에도 향기를 내재한 나무가 있었다. 길거리에서 만난 남자가 내뿜는 담배 연기. 지나는 자동차의 매연 냄새. 어느 집에선가 밥 태우는 냄새. 비릿한 생선 굽는 냄새.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쿰쿰한 슬러지 냄새 등..... 그야말로 많은 냄새가 나를 괴롭혔다. 미간을 찡그리고 숨을 참을 수밖에. 세상 불만을 혼자 감수했다.
지친 몸을 누이면 기침이 나를 괴롭혔다. '컹컹'거릴 때마다 세상이 뒤흔들린다. 알게모르게 내가 받아들인 온갖 오물을 내짜듯 기침이 끝없이 쫓아나왔다. 새벽 한기에 깨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갈증이 나 편의점에서 '커피 맛나는 우유' 하나를 샀다. 무심코 입에 댔다가는 '아차!'했다. 입에 머금은 한줌을 삼킬 수 없다. '이게 왜 이리 달아?'. 기진맥진하여 음식점에 들렀다가 두어 숟가락도 퍼먹기 전에 포기했다. 음식이 짜다. 입에 넣을 수 없을 정도이니. 한나절 지난 다음 잔치국수를 잘한다는 집에 들렀다. 배가 고파 아무렇지 않게 들이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잘 못 생각했어.
거의 남기고 나온 나를 국수집 사장이 문간까지 따라와 묻는다.
"국수를 왜 저렇게 남기셨어요?"
"비린내가 너무 심해서요."
"어머, 저희 집 국수는 그래도 덜한데, 그것도 못드시다니!"
세상에서 받아들인 내 안 온갖 삿된 걸 짜내 그야말로 순수한 상태가 되었을까.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서 허한 몸을 누이면 낙엽처럼 부대끼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밤새 헤매고 다니며, 누군가를 찾으려고 했지만 수많은 얼굴 중에 아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Pavel Panin, Octo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