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한 번의 만남, 천 번의 이별

*garden 2020. 5. 29. 01:37





한나절을 헤맨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니. 인적 드문 곳이 낫겠지. 숲으로 발길을 옮겼다. 숨은 꽃밭을 찾을 수 있을거야. 풀꽃은 씨족사회처럼 모여 산다. 홀아비바람꽃은 홀아비바람꽃대로, 나도개감수는 나도개감수대로. 이쪽 능선과 저쪽 계곡에 피는 꽃무리가 제각각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돌로 존재한다고 했다. 다음에는 식물로 태어난다고 했지. 식물의 정점인 꽃, 꽃을 볼 때마다 차오르는 기쁨과 즐거움을 어디에 비길까. 더구나 여긴 쉽게 오기 힘든 강원도 산골. 반드시 꽃다운 꽃을 찾고 말겠다는 욕심에 숲 깊이 들어간다. 시간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 생기를 주던 봄꽃이 이미 졌거나 며칠 전 요란한 비에 떨어졌어도 이제 여름꽃이 피어나지 않았을까. 허나 차츰 실망스럽다.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으니. 이건 아닌데. 거기에 나아가는 게 더디다. 걸리적대는 게 많다. 거미줄은 물론 억센 숲에 가로막혀 쩔쩔맨다. 너댓 번 넝쿨가시에 걸린 옷은 더러 찢겼다. 동그란 눈으로 웃는 수선소 아주머니에게 세탁한 다음 가져가야겠지. 잠자는 공주가 있는 성으로 가는 길인가. 우거진 나무와 덩굴을 헤치고 넘어서자 가파른 비탈이다. 이 넓은 산에 봄이면 올망졸망하던, 그 많은 꽃이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지나온 구릉은 해마다 은방울꽃이나 긴병꽃풀 등이 널려 있었는데, 마치 늦가을 어느 때 메마른 숲을 뒤지던 가뭇한 기억처럼 흔적 없는 꽃. 대신에 조릿대가 지천이다. 거참, 내가 홀린 것은 아닐까. 햇볕 따가운 구릉, 바위를 넘어서다가 똬리 튼 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꽃을 주시한 적 있다. 사방팔방 몰아치는 바람에 내맡긴 꽃은 잠시도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잔망스러운 몸짓에 촛점을 맞추는 동안 울화가 치민다. 나뭇가지 사이로 쫓아 든 햇빛마저 머물러 있지 못하는 계곡. 바람이 방향을 바꾸자 꽃이 멀어졌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정지해 있기를 바라는 내가 문제야. 눈자위를 눌렀다. 근육이 경직되면서 손발이 저려온다. 견뎌야 하는 일이 자아수양인 것 같아 실실 웃었다. 건너편 산에서 뻐꾸기가 울었다. 허공에 놓인 시간과 바닥을 기는 시간이 다르다. 바람이 내 주변을 한바퀴 감돌았을 때 소요가 잦아든다. 시간이 느려졌다. 필사적으로 웅크린 내게 물리적인 시간이 의미가 있을까. 어느 순간 시야가 트였다. 눈이 환해 깜박거렸다. 셔터를 눌러야 하는데, 이 낯선 감각은 뭐지. 기다리던 순간인데, 나를 향해 웃는 꽃이 눈물겹다.
피사체를 잡을 때마다 꽃과 조우하던 그날을 떠올렸다. 오늘 만나지 못한들 어때. 때로는 별도 구름에 덮여 볼 수 없잖아. 개이면 별이 나타나듯 또, 꽃이 필 거야. 날이 가면 꽃도 지겠지. 그렇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소임을 마치고 미련 없이 가는 꽃처럼 헤어진 이별들을 떠올렸다. 의미를 되새기기엔 짧다. 어쩌다 한번 뒤돌아보는 것처럼인 찰나의 순간. 의례적으로 손 내밀었던가. 어쩌면 나는 미련이나 슬픔 등 감정도 전하결합소자로 착상시켜 둘 수 있다고 믿은 건 아닐까. 앞만 보고 바삐 달려가느라고, 그게 영영 헤어지는 것이라고 알아채지 못하고서는.











David Angell & Russell Davis,
The Adi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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