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이 부드러워졌어. 새 세상이 시작된 거야. 이제 우리가 나가야 할 때야. 자칫 늦으면 안돼. 저런, 넌 왜 얼굴이 그렇게 부었니? 쟤 좀 봐, 아직 잠이 덜깬듯 눈을 반쯤 감고 있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손 잡고 나가야 하는 것 알지? 다 함께 외쳐봐. 내일을 위해!
오늘 점심 메뉴는 새싹비빔밥이다. 아기 볼살을 스친 건가. 깨끔한 맛이 입 안에서 돌아다닌다. 혀를 굴리며 한입 씹었다. 머리 속을 울리는 풍미. 여린 맛을 음미하듯 눈이 게슴츠레하던 맞은편 동료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머, 이 집에 테라스도 있었네. 바깥 탁자에서 먹을 걸 그랬나 봐요."
"여기도 괜찮아요. 사람들 얘기와 바깥 세상이 한데 어울리니."
"그나저나 어느새 봄이 사방에 내려앉았을까! 저기 벚꽃들 봐요."
메마르고 긴 겨울을 지났다. 저절로 침묵하게 된 주변. 우리가 제대로 살아가는 걸까. 나무 또한 진배 없었어. 헌데 생을 지우고 풀 죽은 듯 움츠려 있던 나무가 아니다. 참고 참았던 생기를 한데 모아 밤새 솟아오른 꽃들로 세상이 환하다. 한며칠 찌푸려져 있던 하늘마저 맑아 어느 때보다 고운 햇살이 꽃을 보듬고 있다. 꽃들 사이로 새가 날았다.
벚나무는 장미과에 속한 낙엽 활엽 교목이다. 양지바르고 배수가 잘 되는 곳에서 자란다. 가로수로 많이 심으며, 우리 나라 곳곳에 벚꽃나무 길이 산재해 있다. 봄이면 벚꽃놀이가 당연한듯 여겨진다. 오죽하면 전국 벚꽃 개화지도가 만들어져 있을까. 수명은 의외로 짧아 약 육십 년 정도이다. 산벚, 가는잎벚, 개벚, 잔털벚, 털벚나무 등이 있다. 높이 이십 미터 정도로 자라고, 잎은 어긋나며 톱니가 있다. 사,오월에 꽃이 피며, 열매인 ‘버찌’는 더운 칠월에 까맣게 익는다. 체리는 진작에 버찌를 개량한 것이다. 한방에서는 나무줄기와 껍질을 말려 기침이나 두드러기를 치료하는 약재로 사용한다. 선비들이 좋아하는 매화는 전지가 당연하지만 벚나무를 전지하면 바보로 취급된다. 목재는 조직이 치밀하고 틀어지지 않아 가구나 건축내장재로 쓰인다.
왕벚나무는 한때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로 오인되어 무참히 베어지는 수난을 당했다. 그러나 학술적으로 일본에는 왕벚나무 자생지가 없다. 다시 말하면 왕벚나무는 우리 나라가 원산지로 생물학적이나 식물지리학적 연구 가치가 크다. 주로 남쪽 지방에서 자생하며,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 신례리와 제주시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 전라남도 해남군 산삼면 구림리의 왕벚나무 자생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여의도 벚꽃 축제가 끝난 다음에도 마포대교쪽 강변북로로 나가는 길 그늘에 있는 벚나무는 꽃도 피우지 않았다. 의아해 하던 차에 봄비가 내렸다. 한주일도 안되어 주변 벚꽃이 스러진 다음이다. 지나며 보니 늦게나마 마지막 봄을 지키는 등불 마냥 하얀 꽃을 달고 있어 입가 미소를 머금었다. 저녁 나절 꽃 지고 난 가로를 따라 걸었다. 함박눈 내리듯 한순간 세상을 덮은 꽃이라니. 또, 잠 깨면 흩어진 꿈처럼 흔적 없는 꽃이라니. 헌데 어느 길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아, 꽃 지운 자리에서 푸른 잎이 돋아 나무를 감싼다.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벚나무 아래 머물렀다. 즐겨가던 북한산 산벚나무도 지금쯤 환한 꽃을 피웠을거야. 어느 오후 햇빛 듬뿍 내린 바위에서 꽃비를 맞은 적 있었지. 봄이 절정인 날이었다. 우리 인제 그런 봄날을 다시 맞을 수 있을까. 유난스럽게 향기를 내뿜고 있는 벚나무를 한팔로 안았다. 주변 나무와 달리 꽃 지우고 난 다음에도 네는 이리도 향그러운 자취를 이어가고 있다니.
From the A Bunch Of Thyme by Phil Coul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