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 건너편 키큰 나무들을 보았다
분주한 사람들 아우성이나
질주하는 차량에도 아랑곳 없이
봄 오면 싹 틔우고
꽃 피운 다음
열매 맺기에 열중하면서도
의연한 자태를 흩뜨리지 않는 나무
햇빛이 얹힌 나뭇잎들이 바람에 까분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소녀가 나무 아래서 멈추었다
안전모를 벗자 출렁이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
덩치 큰 버스가 풍경을 가리는 바람에 까치발을 했다
오홋, 차도쪽으로 내밀었던 발을 거둬 들여야 했다
발 아래 보도블럭 틈을 터전 삼아 구가하는 생이라니
바람이 길바닥을 쓸었다
물도 자양분도 없는 이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견뎠을까
초등학교 때 짝이 되었던 영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은근히 순응하던 큰 눈망울
복도를 돌아나가다 말고 돌아보던 단발머리
그래, 네 이름은 '영이'야
주변 소란스러움도 잊고 비스듬한 햇살을 받으며
나를 보고 웃는 듯한 영이 모습 건너 시선을 던지자
흔적 없는 소녀 대신 빈 자전거만 나무에 기대어져 있었다
보도블럭이 햇살에 달구어져 달아올라도
이르게 밤이 와 어둠이 바닥에서부터 뭉쳐질 때에도
불평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영이는 내가 눈길을 줄 적마다
함초롬히 고개 들어 웃음을 지을 듯 말 듯했다
그러다가 어울리지 않게 별 같은 꽃을 품은 모습을 보며
또 다른 세상을 꿈꾸기도 했다
억센 가을비가 뭉쳐 쏟아질 적에도
굉음을 뿜으며 덤프트럭이 지나칠 적에도
영이는 보석처럼 안은 꽃을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온이 영하 아래로 뚝 떨어져 가을마저 할퀴던 날
영이는 떠났다, 서리 맞은 단발머리를 떨군 채로
Arsen Barsamyan, Sad 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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