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묵상 산기슭을 휘돌아 나간 길에 첫 눈 스러진 다음의 가지런한 햇살 걸음을 멈추어 우러러보다가 도열한 나무들이 익숙해 눈을 껌벅거렸다 가뭇한 날이라도 놓지 않으려고 뜬 눈으로 온밤을 지샌 눈물겨운 기억을 떠올렸다 여느 생도 이랬거니 향기 묻힌 바람을 살랑살랑 되돌려 보낸 저녁.. 不平則鳴 2012.01.11
다음 봄날에 집 안 어디엔가 그물을 쳐놓은 할머니. 거기 내가 걸려드는 건 시간문제이다. 나가기 전 치맛단을 쥐고는 나붓이 앉아 손주 옷차림을 여기저기 간섭한다. 오물거리는 입으로 어찌 그런 천둥소리를 내는지, 잔소리가 한 소쿠리는 된다. 말 끝에 다짐을 놓는다. 야야, 할매 말을 절때 흘려들으믄 안된데.. 햇빛마당 2011.05.25
사랑아, 내 사랑아 주렁주렁 달고 있던 호박을 지난 추석 난데없는 물난리에 썩히거나 날려 보내더니, 저놈이 미쳤나. 하루 아침에 꽃을 열두어 송이나 피워낸다. 한편으로는 애닯다. 커다란 잎이 변색하며 오그라드는 통에 식겁하지 않을 수 있어야지. 기온 뚝 떨어진 아침마다 인제는 수정도 못할 꽃을 한다발씩 토해.. 不平則鳴 2010.10.20
말의 시대 술자리는 해질녘 산길을 걷는 것 같다. 서두런들 소용 있어야지. 일어서려다가는 앉고, 채근해도 막무가내이고. 얼추 일고여덟 고개를 넘은 것 같은데도 파장으로 드는 길은 감감하다. 종내 남은 술을 엎지르고 너도나도 쑤썩여 흩뜨러진 안주 나부랭이를 집어 질겅질겅 씹던 한 녀석이 .. 不平則鳴 2010.07.13
그렇게 지날 뿐이지 살이 쪄 예전같지 않은 친구. 변화라도 주려는지 콧수염을 기른다. 간선도로 건너 인근 집에 다녀가기를 고대하는지라 덜컥 약속을 해버렸다. 설치는 우리 꼬마를 진작 알고 있다. 그집 여자애가 내 무릎에 담빡 올라앉아 고사리손으로 귓볼을 당기며 속엣말을 전한다. 말랑말랑한 옆구.. 不平則鳴 2010.06.29
코끼리 울음 솟대처럼 서서 우뚝한 은사시나무를 지표로 소롯길을 걷는다. 허공을 쫓아 온 햇빛이 은사시나뭇잎에서 되쏘여 산지사방으로 팔랑거리는 날개를 편다. 길이 꺾일 때마다 잠겨드는 솟대, 그걸 다시 찾으며 조급한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다가 햇빛이 둥그렇게 모인 둔덕에서 멈췄다. 깊은 .. 햇빛마당 2010.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