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언제까지나

*garden 2004. 9. 13. 10:47












우리가 눈을 뜨기도 전에 자글거리는 라디오. 윙윙-거리던 소음에 잡음도 섞였다가 신호가 잡히면서 차츰 또렷해진다. 아버지는 아침에 뉴스만 듣는다. 당신이 자는 사이에 어떤 사건 사고가 있었을까.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하며 세치도 뽑고, 그리고 아침 상에 앉아서도 귀를 기울인다. 수저 소리를 내면 어머니가 눈치를 준다. 이어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당신이 역정을 낸다. 중파 송신으로 라디오에서 재현되는 코맹맹이 소리에 옆에서 다른 소리를 내면 알아 듣기 힘들다.
저녁 연속극을 시작할 즈음이면 어머니가 라디오를 끼고 있다. 재생이 안되므로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야 곁다리로 귀를 기울이는데, 성우가 서글픈 대사를 하면 어머니가 한숨을 내쉰다.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이미자의 노래가 주제가인 연속극은 이별을 겪은 연인이 간발의 차로 엇갈리며 서로를 찾아 헤매는 안타까운 대목이 거듭되고 있다.


며칠 사이에 훌쩍 올라간 하늘. 그 빈 자리에 청량한 공기가 채워졌다. 벼도 점점 뒷목이 묵직해 고개 숙이고. 한낮에는 더위가 주인 행세를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옷깃에 스며드는 소슬바람은 언뜻 몸을 움츠리게 한다.


그리움이 저리 붉을까. 단풍을 말하기에는 이르나 가을 들머리에 펼쳐지는 색다른 정서. 꽃무릇은 가을 시작 무렵 대공 하나가 다시 올라와서는, 어느 날 갑자기 폭죽같은 선홍색 꽃을 토해낸다. 상사화와 꽃무릇은 다르다. 꽃과 잎이 같이 하지 않아 서로 만나지 못하며 속성은 같아도 꽃 모양은 다르다.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난 뒤 여름에 꽃이 핀다. 꽃무릇은 초가을 꽃이 핀 뒤 지면 잎이 난다. 불가에서는 꽃무룻을 석산이라 부른다. 분홍꽃은 상사화, 주황색은 백양꽃, 노랑꽃은 개상사화 등으로 알려져 있다.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난 뒤 여름에 꽃이 피고, 꽃무릇은 초가을 꽃이 피어 보름 정도 만개한 뒤 꽃잎을 떨군다. 마른 줄기에 얹힌 둥글고 빨간 꽃은 위태위태하다. 외로움 짙은 이름의 가녀린 꽃대들은 큰키나무 그늘에 모여 산다.


모악산 넓은 자락을 붉게 물들이는 전남 함평 용천사는 규모에서 장관이다. 용천사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둔 불교의 고향 영광 불갑사는 선명한 꽃 빛깔이 좋다.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세운 천육백 년 고찰은 비록 옛 모습을 잃었지만 연꽃, 국화 등 꽃 무늬가 새겨진 대웅전 독특한 문살과 절 뒤 참식나무 군락이 볼만하다. 또 한 군데 고창 선운사는 봄엔 동백으로, 가을엔 꽃무릇으로 붉게 물든다. 꽃무릇의 애잔한 숲이 끝나면 우뚝한 수령 육백 년의 장사송이 나타난다. 사찰 주변에 꽃무릇이 유독 많은 것은 뿌리에 방부 효과가 있어 탱화를 그릴 때 찧어 바르면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길렀다.


한편으로 한 번 본 여인에게 말도 건네지 못하고 앓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스님의 혼이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수긍이 간다. 어릴 적 라디오 연속극에서처럼 엇갈리기만 하던 연인을 떠올린다. 이별이야말로 사랑을 완성하는 근원적 힘인가. 꽃과 잎이 서로를 볼 수 없는 운명이라니 아이러니컬하다.







Cherish(1985) / Kool & The 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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