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점이 모여 선을 만든댔지. 길은 선이다. 선을 따라가면 이어지게 되는 생각. 때로 과거로 들어서기도 하고 미처 떠올리지도 못한 미래의 날에 닿아 있기도 했다.
길가에 연한 가로등이 생각의 단락을 끊었다. 우뚝 서서 어둠을 쫓는 나트륨 등. 노란 불빛이 방원을 쳐 제 영역을 확실히 알린다. 종일 딱딱한 아스팔트를 헤집으며 콩콩대던 비둘기가 어둠 속에서 꿍얼댄다. 목덜미를 집어넣은 깃 속에 칼바람이라도 스며든 걸까. 가로등 아래에서 눈을 들자 축복처럼 난분분하는 이 해의 서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저녁답이면 온 식구가 제때 모여 있어야 했다. 여동생은 골목 한켠에 반듯한 돌로 밥상을 대신하여 제 또래와 곱은손으로 하던 소꿉놀이를 팽개치고 달려오고, 또 남동생은 종이딱지를 세고 또 세어 까칠한 입가 섬유질을 묻힌 채로 우물가를 거쳐선 오고, 오늘은 요즘 부쩍 친해진 산 너머 연석이네에 가선 삐질거리다가 온 나도 헐레벌떡 대문간에 들었다. 진작 해가 꼴딱 넘어갔지. 책가방을 마룻바닥에 내려놓기도 전에 귀가가 늦다며 습관처럼 꾸짖는 어머니, 서슬에 입이 한 댓발 나와 삐죽거리지만 이내 지우고선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았다. 아버지 밥만 아랫목에 들어 온기를 담은 채 기다릴 뿐, 우리 앞에 놓인 밥알은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니, 뱃속에 거렁뱅이가 들어 있을 거라고 꾸지람에 상한 마음을 달래려는 듯 농짓거리를 던지는 어머니. 삯바느질을 하느라 달랑거리는 백열등 아래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앉았다 일어서기를 되풀이하며 시김질을 하고 실밥을 입에 물고는 달달달 재봉틀을 밟았다. 드디어 헛기침 소리를 필두로 한없이 깊은 겨울밤이 갈라진다. 마음 졸이던 식구들을 부산스럽게 만들어 놓고 어른이 들어서야 하루가 매듭지어진다. 조각보로 덮여 웃목에 기다리던 상이 대령되고 하품을 하느라 입을 하마처럼 벌리는 우리를 물리치시는 아버지. 비로소 밤이 밤다워졌다. 까만 어둠이 낯설도록 날마다 어지럽기만 한 천연색 꿈을 오늘만은 꾸지 말아야 할 텐데.
아침상은 엊저녁과 달리 좀더 게걸스럽고 부산하다. 밤새 들이찬 허기로 나와 동생들은 아귀처럼 달려들어 밥을 쩝쩝 소리내며 씹었다. 당신 눈치를 보며 어머니가 눈을 흘긴다. 하루 일과가 바야흐로 시작되는 참이니. 온 식구가 함께 밥을 먹은 다음 흩어지고는 밥을 먹기 위해 다시 모인다. 시작은 그렇게 온점을 찍고 마침도 그렇게 온점을 찍었다.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저절로 하게끔 만드는 불문율이 도처에 있어 다들 두말없이 조종되어지곤 했다.
때로 시간도 젖어들었다. 강처럼 소리없이 흐르면서. 푸른색 반점들이 강에 녹아들어 슬프게 보이기도 했다. 겨울강을 품고 들어서도 아무도 없는 집 안. 오늘은 동화 속 이야기처럼 가장 먼저 나를 반기며 뛰어나오는 누군가를 꼬옥 안아보고 싶었건만. 다들 식사보다 중요한 일이 왜 그리 많은지.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어느 때보다 어렵다. 강은 도처에 흔적으로 있었지만 전처럼 흐르지 않았다. 강과 함께 가라앉아 아직도 나는 수면 위를 스치는 시린 바람을 떠올린다. 아련한 어느 저녁의 웃음기 띤 기억만을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