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마당

건조주의보 발효중

*garden 2009. 1. 20. 10:07



화장실에 들기만 하면 물부터 내리는 여자들. 와글거리는 소리가 끊어지면 다시 내려야 할까. 남녀 칸이 한데 있는 곳에서 그렇찮아도 은근히 신경을 곤두세우는 판국에, 아니나 다를까 뒤쪽 문이 덜컥 열리며 들어온 여자. 난처하다. 뜬금없이 뚝 끊을 수도 없어서 고민인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실 문을 열고는 쏙 들어가 버린다. 외려 만천하에 등판을 드러낸 내가 숨을 죽여야 하니.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소리에 위안을 받고 계면쩍음을 지워야 하나. 저 여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난 여름 푸른 계곡 한적한 세상에서 만나던 시원한 바람이나 깃이 아름다운 새의 고운 날갯짓을 떠올리는 걸까.
티격태격하던 남자에게 차이고 들어온 드라마 속 여자, 두말없이 화장실로 들어서서는 문을 쾅 닫는다. 옷을 입은 채 샤워기를 틀어놓고선 벽면을 부여잡고 마스카라 선이 흘러내리도록 울고 또 운다.
친구가 이웃나라 일본에 가선 공중목욕탕에 들어갔다. 곳곳에 양질의 온천이 발달한 나라. 몸을 닦자 개운하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 위 샤워기 물을 내리는 채 샴푸 칠을 해 거품을 내다가 마주친 사람들 못마땅한 얼굴들을 보았다.
우연히 틀어놓은 휴일 텔레비전에서는 수 킬로미터의 땡볕 아래를 걸어 겨우 한 동이의 흙탕물을 식수로 길어나르는 아프리카 어느 부락의 여인을 방영한다.
갈수기여서 단수와 제한 급수를 한다는 뉴스가 나온다. 건조한 가운데 들리는 국지적 소식이라고는 속수무책으로 곳곳에 이는 산불. 한 번 일어나면 크게 번진다. 지하수가 고갈되어 관정을 파다 말고 주저앉아 담배를 입에 무는 동네 어른 손가락을 보았다. 흙 때가 꼬질꼬질하게 배인 손톱 밑과 갈라진 손마디는 투박하다. 메마른 바람이 지나며 트서 갈라진 입술을 훑었다.


수면중에도 느끼는 갈증. 간신히 침을 삼키다가 눈을 뜬다. 바삐 가선 냉수를 따뤄 벌컥벌컥 마셨다. 텁텁함을 지우자 깨는 시각. 퍼런 새벽 어둠에 익숙해지는 동공. 불도 켜지 않고 베란다를 내다 보다가 만나는 시름시름한 꽃나무들. 엽란이나 오죽, 제라늄, 관음죽, 치자나무 등 한때 마음을 쏟던 대상들이 잎마다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끙끙거린다. 맨발로 나서자 한기가 오싹하다. 컵 안 남은 물을 흩뜨리다가 고개를 흔든다. 불을 켜자 드러나는 저마다 고개를 숙인 모습. 이걸 마음에 들인 생명의 나무라고 할 수 있나. 혀를 차며 대야에 한가득 물을 떠와선 화분마다 듬뿍 준다. 꽃나무들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생기를 더하기는커녕 숨 넘어가는 환자처럼 질퍽한 물을 금세 받아들이지 못해 꼬르륵대고 있으니.


되는 일도, 되지 않는 일도 없는 가운데 마음만 서성인다면 어떡하나. 무미건조한 계절. 딱딱한 바람에 넌덜머리를 내는 참에 받은 전화. 한동안 만나지 않은 탓인지 목소리가 반갑기 그지없다. 별일 없으면 챙겨서 나오라고, 눈 구경이라도 하러 떠나자는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서두른다. 산행 다음에 어죽을 잘 하는 집을 안다길래 기꺼이 떼는 먼 걸음. 사실 먹거리야 관심이 없고 낯선 풍광이라도 둘러보는 동안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 심사여서.
바야흐로 스키 시즌이어서 인산인해다. 어중간한 시각에 도착한지라 요기라도 할 겸 들른 매점, 아예 눈을 감았다. 혼란스럽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눈에 보이지 않게 허물어져 있다. 너도 나도 만끽하는 일탈의 해방감 때문에 통제되지 않는 이기심의 난행을 가감없이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이다. 산을 오르기엔 시간이 빡빡하여 곤돌라를 이용해 설천봉에 올랐다. 그도 두어 시간이나 긴 줄에 붙어 차례를 기다린 다음에야. 인공강설을 한 덕에 눈 구경이야 가능하지만 푸썩하고 뭉쳐지지도 않는 결정이어서 정감이 가야지. 능선에 우뚝한 가문비나무, 눈비나무, 눈향나무, 주목, 구상나무들도 오랜 겨울 가뭄에 체구를 잔뜩 줄이고선 견딜 뿐. 중첩된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선해 코를 킁킁거리며 후각을 돋웠다. 앞서 간 사람들 어지러운 발걸음에 일던 흙먼지가 가라앉는다. 차도 갖다 댈 겸 그냥 내려가겠다는 친구들과 떨어져 향적봉에서 혼자 백련사 쪽으로 돌았다. 조심스레 걸음을 떼는 동안 주위로 내려앉는 구름장. 겨우살이가 더부룩히 돋은 가지에 물기가 스친다. 여기저기 갈라진 틈을 메우고 가뭄을 지우며 어느새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소담스러운 눈. 처음으로 가슴을 열고 눈을 받았다. 알게 모르게 들끓던 열기가 재워진다. 균열이 진 마음자리마다 해갈의 습기가 차올랐다. 걱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자기치유에 능한 자연의 섭리에 맡겨야지. 한시름을 놓은 듯하다. 무릇 오면 가고 가면 오나니. 조금씩 쌓인 눈이 나무를 타고 다시금 하늘로 오른다.
다니러 갔을 때 눈도 뜨지 않고 몰아쉬던 가쁜 숨. 오래 응급실 침상에 계시던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그 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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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denza * New Tro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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