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憤抒情

옛날옛적에

*garden 2009. 3. 12. 14:47



말간 햇살이 낭창거리는 들녘. 비바람에 시달려 신산한 문설주 거친 면에 기대 선 이모, 아까부터 눈길이 저만큼 앞을 훑는다. 슬금슬금 들이찬 봄을 찾는 걸까. 아니면 분주해질 기미를 떠올리는 건지. 시간을 내야겄네. 밭둑 마른 콩나무 줄기를 말끔히 걷어야지. 올해에는 동부콩도 좀 뿌려 두자. 밥에 섞어 두면 다들 맛있게 먹을 테지.
"오늘 누가 오나?"
"올 사람이 오딨따고. 암도 안온다."
"구라만 와 여게 종일토록 서 있는데?"
"야가. 지금 무슨 말을 하노? 내가 운제 종일 서있었다고."
눈가에 설핏 맺힌 이슬 방울을 본 듯도 하다. 허공을 지치는 바람소리가 매섭다. 봄바람이 아직도 시려, 난데없이 맞받으면 눈물이 난다고 했는데. 어떡하나? 근심스레 본다. 머리에 덮어 썼던 수건을 풀자 삼단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새삼 깜박거리며 이모의 건강한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보았다. 입 열면 드러나는 박 속 같은 이, 그 사이로 쫓아나오는 향기로운 꽃잎 같은 이야기라도 듣고 싶은데.


저녁을 먹은 식구들이 한가롭게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호롱불이 춤을 추자 그림자가 흙벽을 불쑥불쑥 더듬는 것을 본다. 누워선 발을 들어 이리저리 튼다. 우쭐거리기도 하고 쭉 늘어나기도 하는 그림자놀이도 이내 심드렁하다.
"와? 옛날 이야기라도 해주까?"
심심해하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 이모가 말을 던져 다가간다. 누운 채 올려다 보니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린다. 만지고 있던 옷가지를 한쪽으로 밀어 틈을 내길래 냉큼 이모 허벅지에 머리를 얹었다. 이모는 실을 꿴 바늘 끝을 머리카락에 비비며 입을 열었다.
"딸을 셋이나 키우는 농부가 있었능기라."
'에이, 또 그 이야기.....'
말을 꺼낼려다가 만다. 가끔 이야기 뒷부분이 달라지기도 하던데 그까지만 기다려 볼까.
.....장날에는 수확물을 들고 나가 팔아서는 일용품도 사고 사랑스런 딸들이 원하는 선물도 사 왔지. 제일 큰딸을 위해서는 모습이 에쁘게 비치는 거울이 달린 반닫이궤를 사고, 둘째딸을 위해서는 깜찍한 꽃고무신을 샀지. 목이 컬컬해 주막에서 한잔하고는 기분도 좋아졌지. 그리고 막내딸을 떠올렸어. 나오면서 '어떤 선물을 원하느냐?'고 물었지. 그제서야 살짝 웃던 딸이 '예쁜 장미꽃이 보이면 한송이만 꺾어달라.'던 걸 생각해냈지. 잊어버릴까 싶어 산길을 걸으며 내내 두리번거렸지. 적적해서 혼자 콧노래도 부르고 걷는데 노곤한 거야. 마침 커다란 고목이 서있는 야트막한 언덕이 보여 '한숨 자고 가자.' 생각한 아버지는 몸을 누였지. 코를 '드르릉드르릉' 골며 신나게 자고는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는데 셋째딸이 퍼뜩 떠오르는 거야. '아차!' 하면서 '이러다가 장미꽃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카지?' 하고 걱정하는데, 언덕 너머 꽃으로 두른 담이 보이는 게 아니겠어. 달려가 봤더니 정말 담장 위로 장미꽃이 저마다 뽐내듯이 화들짝 피어 있는데, 뛸듯이 기뻤지. '아아, 우리 예쁜 막내딸이 바라는 선물을 가져갈 수 있겠구나!' 하고. 손을 뻗어 그 중에서도 색이 가장 진한 장미꽃을 꺾어든 순간 천둥 같은 소리가 났지.
"그라고 거인이 나타났잖아. 집에 가서 젤 먼저 쫓아나오는 딸을 달라꼬."


잠에 취해 반쯤 감은 눈으로 매번 똑같은 이모의 옛날 이야기를 채근했다. 지겹지도 않은지 장미꽃을 꺾어드는 순간 나타나는 거인. 사실은 그 거인이 마법에 걸린 왕자인데. 뒷이야기를 생각하며 나는 껍데기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간다. 이모가 실밥을 입에 물었다. 가슴을 토닥거리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구 밖에 어둠이 시커먼 입을 크게 벌리고 있겠지. 동네 개들이 '컹컹' 짖었다.
존재감이 이리 가소로워서야. 숙명은 굴레처럼 씌워져 벗겨지지 않을 게다. 갑갑해도 어쩔 수 있어야지. 여자에게 특히나 척박한 현실을 떠올리자 한숨이 난다. 정말 거인에게라도 시집 가야 하는 장미꽃 화원이 어디 있을까. 쫓아가서 기필코 꺾어 버려야지.
만화방 앞에서 조잘대며 모여 있었다. 저마다 주인공과의 근사한 조우를 생각하여 떠벌떠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점점 작아져 세상을 구할 수 없어. 누군가 꺼내주지 않으면 안돼. 어둠 속에서 손을 휘젓는다. 저쪽 구석에 누워 있던 이모가 새근거리는 중에 뭐라고 중얼거렸다. 어둠이 망또를 두르고는 사방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










Govi * Lover's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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