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을 지나는데 들리는 구수한 노래. 낡은 수레가 고여져 있고, 알록달록한 추억의 사탕을 팔고 있다. 달콤쌉싸름한 버터사탕 냄새가 번진다.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눈을 감자 깊은 곳에 재워 둔 낡은 시간들이 새나왔다. 비릿한 삘기맛과 솔 냄새가 불현듯 눈물나게 기억된다.
이른 아침과 점심때 하루 두 번 버스가 다닌다. 오랜만에 가는 외가. 서둘러 쫓아갔건만 버스를 놓쳤다. 할 수 없이 북적대 미어터질 듯한 다른 차편으로 가다가 갈림길 소읍쯤에서 내렸다.
어머니와 나는 버스가 가 버린 쪽을 보았다. 뽀얀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길을 덮고 뻗쳐 하늘까지 가린다.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맴돈다. 황토로 덮인 세상. 산도 벌거숭이이고, 드러낸 벌건 속살이 내뿜은 흙이 천지에 가득했다. 코 끝을 문질렀다. 흙냄새를 맡자 잔기침이 바투 나온다.
걸어도 걸어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스며들어 있는 길. 어머니는 동생을 들쳐업고, 봇짐을 인 채 나와 남은 하루를 꼬박 걸었다. 한가한 허공을 잠자리가 거침없이 난다. 발이 바빠도 눈이 잠자리와 동무한 채 떨어질 줄 모른다. 양쪽으로 미루나무가 나란한 신작로가 곧게 이어지다가 몇 번 휘돌더니 사라진다. 걸을 때마다 풀썩거리는 흙먼지를 새삼스럽게 킁킁 들이마신다. 어머니도 너덧 번 포대기를 끌러 다시 매었다. 그 때마다 업힌 동생은 잠결에 미간을 찡그리며 하품을 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야! 원아,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
셀 수 없는 산을 넘고,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초가 툇마루에 어머니가 털벅 앉았다. 빈 집인 줄 알았는데 인적이 있다. 여닫이 문이 어렵게 열리며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삐끔 내다본다. 기웃대더니 입을 오물거리다가 빨간 연시를 하나 내밀었다. 입가에 관음보살 같은 미소를 환하게 달고.
해가 사방 우뚝한 산 위를 지난다. 세상에 아무도 없어 우리만 꼬물거린다.
길이 달라졌지. 돌부리에 채이거나 위태위태한 논둑길에서 줄타기를 한다. 어림만 하고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발이 빠지기도 하고. 질척질척하여 고무신을 끌자니 힘든데, 죽으러 가는지 어머니는 어둠 속으로만 숨어든다. 이제 돌아보지 않는 당신이 야속하다. 잰걸음을 쳐도 희끗한 어머니 치마가 눈여김에서 멀어졌다.
시골에 가면 만날 아이들을 떠올렸다. 자랑거리들을 주머니에 넣어 두었는데. 그게 걸음을 뗄 때마다 떨그렁거리며 부딪친다. 그 소중한 것마저 버리고 싶을 만큼 거추장스럽다. 슬슬 내리던 어둠이 주위를 덮었다. 길쭉하게 솟은 나무들이 어깨를 맞댄 채 사방에서 덮칠 듯 내려다본다. 눈을 크게 뜨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애절한 풀벌레 소리에도 놀라 가슴이 두근거린다. 웬 귀신이 그렇게 많나. 주위 득시글거려 애써 울음만 삼킬 수밖에.
거친 숨이 목까지 차올랐는데 어머니가 섰다. 자리를 정하고 나무 아래 말없이 앉았다.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다행이다. 조금 전까지 허허벌판을 혼자 헤맸는데 앉은 자리가 안방처럼 아늑하다. 괴나리봇짐을 풀었다. 내민 고구마를 껍질째 꾸역꾸역 삼켰다. '캑캑'거리면 어머니가 등을 두드렸다.
자시가 훨씬 넘어 동구 밖에 닿았다. 멀리서 일렁이던 호롱불이나 관솔불이 점점 가까워졌다. 어둠 속에서 아우성이 날아온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서있었다. 친척들이다. 시끌시끌하다가는 우리를 보고 달려들었다. 예쁜 막내이모가 나를 들쳐 업었다. 그게 얼마나 좋은지. 따뜻한 등에 뺨을 대자 어른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차츰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