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처 달리던 열차가 앞발에 제동을 건다. 사람들 몸이 밀리다가 쏠렸다. 정차역에 들어설 거라고 웅얼대는 안내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부산한 일단의 무리. 알록달록 차리고 선글라스까지 챙겨든 사람들이 진작 창 밖 풍경을 살피며 선크림이나 미백화장품을 맨살에 토닥였다. 햇볕 아래선 연약한 피부가 따끔거린다고 쫑알대고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오늘 근방 산이 북적일 게다. 이윽고 열차가 섰다. 들떠 몰려나가는 사람들. 찾아나서는 상춘이어야 제격인가 보다. 저마다 길에서 깨득거리는 게 즐겁다. 길다란 플랫폼에서 아이들이 물총으로 장난질하며 앞다투어 지나갔다. 엄마아빠가 입을 벙긋거리며 서둘러 뒤따른다. 세숫대야 가득한 물에 기포를 올리며 물장난하던 때를 그린다. 기척을 죽이고 움찔대던 열차가 물총에서 뿜어진 물처럼 다시 쏘아졌다.
아랫지방으로 향할수록 더욱 눈부신 햇빛. 어제의 는개를 지우며 바람은 무딘 날을 늘어뜨리고 더딘 걸음을 뗀다. 새벽 베란다 창을 열었을 때엔 목을 움츠렸는데 한낮은 전혀 다르다. 혼곤한 기분을 가라앉혀야지. 몸을 의자에 눕힌다. 오랜만에 볼 친구들 얼굴이 모호하다. 어릴 적 모습에 겹친 눈코입이 동떨어져 난무한다.
한번 시간을 내 다니러 오기가 번거로웠지, 어울리자 차츰 달아오른다. 더러 연락이 오가기도 했지만 도통 기억나지 않는 이도 있다. 상대는 나를 꿰차고 있는 듯 익숙하게 떠드는 데 정작 나야말로 엉거주춤하다. 아무려면 어때. 어릴 적처럼 낮은 소리로 낄낄거리자 동심으로 내몰린 듯 덩치들이 올망졸망해졌다. 그런 참에 봄이 널 보았다. 내가 너를 알아채지 못했던 듯 너도 지나쳐 가더구나. 차암 사람 마음이란, 섭섭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니. 아이들에게서 듣고서야 두리번거려 한구석에서 오디새마냥 달라붙어 활짝 웃는 너를 보았다. 도무지 다가갈 수 있어야지. 마음 졸이는 사이 시간만 흐른다. 늦어서야 인지한 듯 새삼 눈길을 주는 너를 느낄 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손이라도 들어줄 걸. 별안간 뻣뻣해진 고개를 돌릴 수도 없으니. 별빛 같은 시선이 더듬는 뺨 근육마저 경직된다. 예전 담벼락 너머 훔쳐 보던 선머슴아처럼, 오랜 세월 지나도 여지껏 뻔뻔스러워지지 못했으니. 몽글몽글한 아련함을 더듬으면 분명코 표현 못한 뭔가가 있는데 말야. 눈썹 짙던 너네 아버지는 아직 계시니? 아버님 고향이 바닷가랬지? 정원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에 귀 기울이던 모습을 뵌 적 있다. 콧등과 양쪽 뺨에 흩어져 있던 네 주근깨는 어디 갔니? 건너다 보이는 뽀얀 네 살결에서 예전 모습을 되살리기란 어렵구나.
그때처럼 지금도 제각기 터전을 지킬 수 없는 시기이다. 농부는 산을 앞에 두고 시름하고 어부는 산더미처럼 밀려드는 파도 앞에서 절망하는 때여서. 해 그림자가 길어진 날 농부는 바다를 향해 떠나기도 하고, 어부가 들로 오기도 한다.
넓은 들을 마주한 어부가 큰소리를 지른다. 알싸한 황토 밭고랑에서 쭈볏쭈볏 참새 떼가 올랐다. 손바닥에 침을 퇫퇘 뱉어 문지르며 혼잣말을 한다.
"여그선 참말로 뭔들 못하겠으야."
말 끝에 웅얼웅얼 돌아온 메아리가 매달렸다.
바다로 간 농부가 괭이로 바닷물을 꽁꽁 쪼기 시작했을 때 어부는 지평선이 보이는 들에 천라지망을 쳤다. 창이 흔들리는 오후 나절엔 그물에 커다란 몸집의 바람이 걸려 그네를 타기도 한다. 아침이면 바삐 지난 햇살이 떨어뜨린 금빛 비늘이 걸려 있기도 했다. 마침내 그물이 나긋나긋해지며 전에 없이 커다란 먹잇감을 가두었다. 촘촘한 눈을 채우며 여린 싹이 돋았다.
다시 또 보기 힘들겠구나.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으니. 주변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가 너를 배웅하지 못했다. 물론 이 친구 저 친구를 통해서 소식을 들을 수야 없겠느냐만, 여지껏 기별 없이 잘 살았으니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까. 어느 때 신록 짙은 그물 눈 사이에 소곤거리던 네 조그만 입과 주근깨 가득한 지난 모습을 새길 수도 있으려니. 살이란 게 별거더냐. 파라 카보란 분자처럼 스무 개의 얼굴일 수도 있으니. 그렇게 살자꾸나. 마음껏 그리워하면서 또 그렇지 않은 척 시침을 떼면서. 오자말자 사그라지는 봄에 섞여 와글거리는 여름 아우성까지도 지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