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중으로 마감하세요."
"이렇게 원고량이 많은 걸 어떻게 마칩니까?"
"애초 기일도 못댈 원고를 왜 붙잡고만 있습니까?"
몰아세우며 업신여기는 나쁜 버릇, 고쳐야 할 텐데. 그래도 상대가 시비조로 나오면 고분고분할 수 없다. 언성을 높이고 채근하기 전에는 매진하지 않는 산만함이 싫다. 참고 참다가, 쫓으면 능력이 그뿐이라고 내뺀다. 두 권을 잡고 있는 중에 산지사방으로 촉수를 뻗어 정신 없는 와중에 세 권을 진행했다. 따지고 들면 남들만큼 못하는 심정 어련할까만은, 이해하려다가도 불쑥 드러내는 이기적 행태가 밉다. 정열도 없이 건성으로 처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야.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극진한 동생네. 당연하다지만 정도 이상이어서 거북한 적이 많다. 정색하며 이를라치면 살이 붙어 포동포동한 미간을 찌푸리며 눈물부터 찍어낸다. 형에게 공손한 동생 태도에서 기인한 점도 있겠지만 어느덧 습관이 되어 바꾸기도 어렵다. 눈 딱 감고 받아들이면 되지만.
오랜만에 식구들이 둘러앉았다. 마련한 음식을 드는데 맛이 어째 이럴까? 이건 뭐, 영 아니올시다이니. 그릇 사이에서 찔끔거리던 젓가락을 들고는 주저한다. 반찬을 네맛내맛도 아니게 버무려서는 원재료와 양념이 따로이고, 간이 안맞는데다 입맛마저 모호하게 해 버리니. 웬만하면 먹어야지, 싶어 들지만 이물질을 넣은 듯 삼킬 수 없다. 드나드는 친인척이 다들 인지하는 터라 넘어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부지불식간에 맞는 집안 행사때만은 그렇게 어중띠게 장만하여 올릴 수 없다. 요즘엔 차림상이 있어 두루 살펴보고 주문하면 된다지만 이도 형식이나 정성이 중요하기에 거론거리도 아니다. 동생네를 배제하고 팔을 걷어 붙인 아내가 떠맡아 씨름한 지도 수십 년. 그 맛깔난 솜씨에 다들 감탄하는데, 더러는 명절때를 빌어 개별적 시간을 가지고픈 아내 입이 뽀루퉁하니 우선 나부터도 눈치를 보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어른이 안계시게 되자 핑게를 대며 차롓상 차리기나 기제를 분양할 참이다. 경우가 아니라고 소리 치며 물리기엔 역부족이다. 기실 사촌들은 이런 기회를 학수고대하였기에 묘하게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앞뒤 가리지 않고 가져갔다. 그렇다고 사촌네 손맛도 입에 들러붙지 않기는 마찬가지. 드러내 말을 못하지만 집안 남정네들 속이 끓는다.
기제가 있어 허겁지겁 내려간다. 배가 고팠기에 우선 동생네 식탁에 앉았다. 내색 말아야지, 작심했지만 어느새 손이 움직인다. 어머니처럼 차려내 놓은 음식을 색깔을 맞춰 재배열한다. 젓가락으로 콩자반을 콕콕 집어 씹는데, 동생댁이 잘라놓은 김 한 장을 밥술 위에 얹어준다. 일부러 선뜻 입에 집어 넣었다.
"김이 참 맛있네요."
"식구들이 잘 먹길래 주문해서 산 거에요."
동생네 식탁은 콩자반에 마른오징어무침, 멸치볶음과 김치에 나물, 김, 심지어는 미역국까지 인스턴트 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집에서 식사할 기회가 없다. 밤 늦게 돌아다닌 바쁜 아내는 해가 떠도 오밤중이었다. 건드려도 일어나는 대신 꿈결에서도 누구를 만나는지, 입가 미소를 띤 채 도통 돌아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입시를 앞두고 마음이 바쁜 아이는 그렇게 일렀건만 아침을 거르고 나간다. 무엇보다 다이어트가 지상과제라는 데에야. 나부터도 일과에 약속이 겹쳐 점심이나 저녁을 밖에서 해결해 버리기에 식구들이 마주 앉을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설거지 그릇을 담는 개숫대는 바짝 말라 있고, 행여 냉장고 안에 한 꾸러미씩 사다 둔 썩은 과일을 들어내는 역할도 내 몫이다. 코를 킁킁이게 만드는 구수한 음식 냄새가 집 안에 감돌지 않는 대신 미백이나 주름제거 성분이 든 값비싼 화장품이 화장대에서 입을 벌리고 나를 맞기 일쑤이다.
'적어도 해가 바뀌기 전에 이런 일을 막았어야 하는데. 세상이 바뀌었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린다. 개운치 않은 하늘에 점점이 하얀 눈발이 내리기 시작한다. 공복으로 입맛을 다시다가 입을 크게 벌렸다. 허겁지겁 아무리 받아 먹어도 눈으로는 포만감을 이룰 수 없었다.
Rivers Of Time * Koen De Wo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