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계곡이라 음습한 부연동. 그래도 산정에 해가 오를 즈음에는 역광에 사방이 금빛으로 우쭐거린다. 바람이불에 포근하게 감춰지다가는 낱낱이 드러나던 낙엽 두둑한 길을 가는 중에 귀를 쫑긋거린다. 길이라지만 길이기 힘든 길. 발은 푹푹 빠지고 경사진 바닥은 금방이라도 계곡쪽으로 몸을 밀칠 것만 같아 내내 긴장한다. 나직한 물소리. 맴도는 바람 흔적. 꽃잎 사그라든 오후의 늦은 시각. 큰키나무가 어느 때 맹렬한 바람을 안고는 지짓대를 잃어 나딩굴었다. 나무와 나무에 걸쳐 다리를 놓듯 낮게 길을 막았다. 인적 드문 오지라, 치울 엄두도 못내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나처럼 오만한 이가 들거들랑 기꺼이 머리 숙이고 지나시라. 위대한 자연에 자기를 비쳐보고 순응하는 법을 몸에 배이게 하라는 가르침을 달게 새기시라.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 경관에 분위기가 살아난다.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바늘처럼 콕콕 찌르며 스며들기를 바라는 이들 발길이 사철 끊이지 않는다. 그중 빽빽한 천칠백여 그루 전나무보다 돋보이는 길가에 쓰러진 나무 둥치 하나. 헐떡이던 숨을 지웠어도 위용은 살아 있어 그앞에선 다들 머리를 숙인다. 이 전나무 숲길을 시멘트로 포장한 적이 있다. 아무리 황토와 마사토를 섞었다지만 호흡을 막힌 수십 그루의 전나무들이 한꺼번에 고사해 버렸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부랴부랴 시멘트를 걷어내고 예전 흙길로 되돌리고서야 온전해진 숲.
오늘 그대는 숲에 들며 무엇을 바라는가. 편한 걸음이나 왕성한 활력 등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아예 걸음을 멈추시라. 그대로 둔 숲의 모습을 바깥에서라도 그리기 원한다면 해악을 삼가 지나도 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마시라.
개발을 해야 살지. 강이라든지 하천 바닥도 파야만 돈이 된다. 논밭뿐인 벌판에 공무원들이 도시계획을 새긴다. 땅주인이나 진작 이를 눈치챈 투기꾼들이야 두팔 들어 환영한다지만 생각만으로도 답답하다. 이쪽과 저쪽 아파트 단지 사이 손바닥만한 공간이라도 있어 숨통이 트였는데 오밀조밀 채우고 사방을 가리는 논리를 그냥 두고 봐야 하나. 할 수만 있다면 오대산 숲길 쓰러진 나무라도 빌려다 놓을까. 부연동 숲자락에 누운 큰키나무라도 갖다 놓아 순응하는 법도를 세워야만 하는지. 그래서 세월을 새긴 나뭇결마다 내리는 초록 이끼로 그윽한 웃음 짓는 세월을 맞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변해가는 게 서럽다. 달이 이지러지면 애처럽다. 반달이어도 서운하고 차도 성에 차지 않는다. 계속 바뀌어 다른 형태를 빚는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대, 꽃잎 져버린 둔덕에서 혼자 눈물 지어 본 적 있는가. 옛사랑의 애닯음에 가슴을 치는가. 어느 때 찾아간 고향집에 돌담 대신 낯선 건물 가득하고 사방으로 횡행하는 길이 나란하던 미루나무를 지우고 우물가 흔적마저 없애 버렸다면.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 하나마다에 실낱같은 애정이라도 온전히 심어 천착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