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장미 이야기

*garden 2011. 5. 31. 17:18




두말할 필요없이 남자와 여자가 엄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떨어져 있어야 당연한데, 경재 형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일쑤여서. 볼 적마다 묘한 기분인데 이거야말로 이상한 게 아니다. 단언코 시샘하는 건 아니기에. 다만 스스럼없이 섞여 깔깔거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새침만 떨던 이가 고개를 젖히고 웃지를 않나. 주저하며 끼어드는 이도 있다. 허나 그뿐이다. 경재 형이 좌중을 이끌어가므로 한 마디 말도 깝죽댈 여지가 없다. 그럴만도 하다. 큰 키에 달변이며 돋보이는 영특함 등이 가히 견줄 자가 없다. 음악적 소양도 뛰어난데 특히 피아노 연주에 일가견이 있다. 건반에서 현란하게 옮겨다니는 긴 손가락을 보면 남자인 나도 설레이는데 어련하랴. 경재 형이 심란한 표정으로 있으면 금방 쪼르르 달려가는 이가 보인다. 이어 하나 둘 사람이 모여들면서 차츰 재담이나 웃음소리가 드높아진다. 드물게 사람 너머 나를 부르기도 한다. 웃음으로 얼버무리지만 본능적으로 움츠린다. 시선이 모이는 자리는 부담스럽다. 종우 형이 나타났다. 종우 형이야말로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이다. 우선 말을 앞세우지 않아 듬직하다. 수수하지만 선한 웃음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몇몇이 종우 형 신혼집에 몰려가기도 했다. 우리를 맞는 아담한 아주머니가 여성스럽기 그지 없었는데, 단칸방에서 늦게까지 떠들어도 내색이 없다. 오히려 신랑보다 더 선량한 웃음으로 사람을 황홀하게 만든다. 그럴싸한 오디오가 있기에 쾌재를 불렀다. 심심하면 쫓아갔다.
항구도시에 여행 갔다가 진작 마음에 둔 LP음반을 너댓 장 구해왔다. 트랙 등을 훑어도 들을 수 없기에 답답하다. 궁리 끝에 종우 형을 떠올렸다. 작정하자 잴 것 없다. 한달음에 쫓아가 쪽문을 두드렸다. 기척이 없다. 동정을 살피며 귀를 기울인다. 그 동안 한두 송이만 보이던 장미가 어느새 만발해 골목을 달구었다. 지나던 사람들이 서성이는 나를 힐끗 본다.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냥 돌아가야 하나. 음반을 고쳐 쥐는데 문이 살짝 열렸다. 선한 얼굴이 쫓아나와 마음이 풀어진다.


형은요? LP를 몇 장 구했기에 들어보려고 왔습니다만.
어서 들어오세요. 형님이야 있다가 없기도 하잖아요. 제가 이렇게 반기는 데요.
어림짐작보다 방이 좁다. 불을 밝혀도 트랙을 구분하기 힘들다. 할 수 없이 음반을 말 그대로 Long Play로 걸어둔다. 첫 곡이 끝나 다음 곡으로 이어진다. 이 곡은 익숙했는데 어찌 이리 낯설지. 이국가수가 직접 기타를 퉁기며 읊조리는 가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도 한다. 커피를 내왔다. 짙은 커피 향이 점점이 떠도는 게 다행이다. 앞에서 자꾸 말을 시킨다. 그게 은근히 신경 쓰인다. 바닥을 내려다 볼 수 없다. 이것 참, 방석을 제대로 깔고 앉기나 했는지 원. 어렴풋이 창 쪽으로 눈길을 준다. 그런 내가 우스운지 맞은편에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드러낸 팔, 맨살 솜털이 낯설다. 음악과 커피 향과 어려운 전공서적 들, 주변에 있는 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뇌어 보았다. 이름마저 입안에서 웅얼거려지자 의미가 모호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냉큼 일어서 나가기도 그렇고 앉아있기도 어렵게 되어 버렸다. 조그만 입이 오물거린다. 나직한 말소리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가늠하려고 애쓰지만 아득하다. 방이 가라앉다가는 불쑥 떠올랐다. 담장 위를 기던 넝쿨장미가 어떻게 비집고 들어왔는지, 새빨간 꽃몽오리가 불쑥불쑥 터뜨려지며 향기를 뿜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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