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무섬다리

*garden 2012. 4. 4. 10:18





무심코 빈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책꾸러미가 이리 무겁다니. 손가락이 끊어지는 듯 고통스럽다. 엉덩이를 붙이려다가 깜짝 놀랐다. 재빠르기도 하다. 순식간에 나타난 웬 아주머니가 냉큼 앉았다. 경우나 예의를 따지기 전에 이건 인간성 문제야. 얼결에 소리라도 지를 뻔했다. 아니다, 사정이 있을거라 생각해야 할까. 괘씸한 심정을 추스리려고 애쓴다. 마음 한켠에 무안함도 있다. 앉지 말아야 할 자리를 탐한 듯. 헌데 상대야말로 새삼 주변 시선이 부담스러운가 보다. 딴청을 피는 게. 불현듯 측은해졌다. 설마 고단한 내 삶의 단면을 엿본 건 아니겠지.
나무 속살에 새긴 사랑의 맹세 같은 글을 읽었다. 책장을 넘기면 일어나는 풋풋한 비누냄새와 사월 보리밭처럼 펼쳐진 문장의 감미로움을 음미하느라 눈을 감았다. 지난 기억이라도 꺼내들면 왜 이리 아련한가. 서점을 나서며 만난 어스름과 총총한 도시의 불빛에 감탄하며, 불현듯 따뜻한 그 무엇인가로 향하던 애틋함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민이라든지 감상에 젖어서는 안되는데 말야.
집앞으로 가는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도 북적이기는 매한가지. 그래도 바로 떨어지니 부담이야 덜하다. 헌데 이번에는 앞자리 아가씨가 벌떡 일어서는 게 아닌가. 얼굴이 화끈하다. 홍당무가 따로 없을 걸. 한사코 말리느라 실랑이질을 한다. 손전화나 액정화면에 눈을 박고 있는 여느 사람과 달리 드물게 무릎에 펼쳐둔 책이 신선하다. 단정한 미간에 감도는 따뜻함이라니. 이래서 세상은 살맛 나는 것 아닌가.


외나무다리라 해야겠지. 길은 한 길. 걷는 방향도 같아야 한다. 그 위에 머문 남녀를 감싸고 도는 오후의 햇살. 언뜻언뜻 지나는 구름만 아니었어도 한결 나았을걸. 바람이 날을 세우기도 한다. 그때마다 수면에 파문이 일었다. 위태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도 외나무다리에 올랐다. 사랑 없는 날처럼 잔뜩 움츠리고 가야 하는 길. 사실은 눈 돌릴 겨를이 없었다. 사치스런 게 감정이라고 허울을 벗어 던질 때마다 물이 끓어올랐다. 사방 용이 몸을 뒤채는 것처럼 물비늘이 반짝여 눈을 뜰 수 없다. 산란하여 어질거리는 걸음. 아찔하다. 허공을 더듬는 내 발이 낯설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감싸고 도는 온기를 보았다.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이 강을 이뤄 소통한다. 저들이 왜 빛나는지 이제서야 알았다. 손을 내밀어 상대를 잡아주자 흔들림이 없어졌다. 바람이 잦아든다. 비로소 사랑이 부풀어 올라 서로의 몸을 둥둥 띄웠다. 나를 짓누르고 있던 건 무엇인가. 의지가지 없이 지나온 외로운 걸음.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가둔 죄 크다. 강마저 따뜻한 품이 그리워 구비쳐 흐른다는 걸 왜 몰랐을까.
















Lee Oskar, The Day After You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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