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잡을 수 없는 세월이라더니. 봄이라 여겨 아직 긴팔차림으로 견디는데, 한낮이면 벌써 염천이다. 우리나라 기후가 아열대에 들었다는 둥 동료들은 모이면 입을 맞춘다. 땀을 훔치며 갸웃한다. 일기변화에 적응이 어려운가. 어질어질하여 혼미스러운 게 그래서인가. 순서대로 일을 차근차근 처리하는 습성을 지닌 나로서는 이런 때가 혼란스럽다. 꽃이 제대로 피지 않는 것, 꽃과 잎이 정해진 대로 피지 않는 것, 풀꽃이 미처 피기도 전에 나무가 무성히 잎을 틔워 그늘을 만들어 버리는 것 등.
살갗이 긁힌다. 살펴보니 손톱 끝이 깨져 있다. 이도 근래에 없던 탈이야, 하고 뜯어낸 지 한주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손질한 자리 옆이 다시 깨졌다. 급한 대로 이로 물어뜯었다. 어릴 적엔 이러면 혼났는데 말야. 매끈하지 못한 손톱이 내내 걸린다. 와중에도 때 맞춰 해야 하는 일을 떠올렸다.
"계절이 바뀌었는데 필요한 옷 없냐?"
"어디 가시게요?"
"여기저기 보낼 선물 준비로 백화점에 들를 참인데 별 일 없으면 같이 가자."
해서 아이와 나선 건 좋다만, '이건 어때? 저것도 괜찮네!' 하며 과장되게 가리키지만 도리질만 하는 통에. 가격에 구애 받지 않고 어울리는 옷이라면 사 주고 싶었는데 애비 맘도 모르는 녀석 같으니라구. 취향과 세대가 이리 달랐던가.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우선 방향을 정할 때부터 티격태격했다. 가까운 백화점을 골랐는데, 애들이 이용하는 백화점이 따로 있다는 데에야. 백화점에 가서도 층별로 옷을 모아 둔 곳만 뒤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도 아니다. 알고보면 마음에 둔 미묘한 차이를 짚어주지 못한다. 결국 나도 마음속 고집을 꺾지 못하고, 아이도 원하는 것을 표현 못한 채 타협 아닌 타협을 하여 선물도 어정쩡하게 되었다. 같이 물건을 고르고 의견을 나누며 공감을 형성하려던 건 욕심이나 스스로에 대한 위안인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참던 부모님 세대와 따지고 싶은 일이 있어도 삼키던 우리가 아니다. 아닌 걸 아니라고 분명하게 표명하는 아이가 어쩌면 대견하다가도 이건 아니지 않나 싶어 서운할 정도이니. 틀림없는 것은 이제 품 안에 둘 일이 아니라 한눈을 질끈 감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2010년 인구총조사에서 전체인구 중 14.4%에 해당하는 베이비부머 세대. 한꺼번에 나온 아이가 많다보니, 심한 경쟁 속에서 입시도 치열했다. 그렇게 올라와 한국사회의 산업화를 이끈 주역으로 정신 없이 달려왔지만 제대로 된 노후준비도 없이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안타까운 시점이라고 한다. 산에 오르면 중년 아저씨, 아주머니 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때로 말을 건네면 공감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나잇살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여 눈쌀이 찌푸려지는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살아서 죽지 못하고 죽어서도 살지 못하는 우리가 새삼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