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말썽을 부릴 적마다 뱃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내고 싶다던 어머니. 말 잘듣는 아이로 다듬어 내고 싶었겠지. 딴은 그렇게 어머니 자궁에 들어 여의치 않은 부분마다 채워지고 거듭나 온전해질 수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란 것은 나였다.
어느 해 겨울, 큰눈이 내렸다. 손발에 동상이 들까봐 염려하는 어머니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온마당을 휘저어 눈을 굴린다. 누군가 이른 새벽부터 애를 써 한길가에 세워 놓은 눈사람은 우람하며 위압적이더라만 그게 쉽지 않다. 결국 몸통과 머리가 거의 같은 조그만 눈사람이 만들어졌다. 눈과 귀를 붙이고 코를 세우며, 문득 눈사람이 걷고 말하게 되면 어떨까 기대하지만 그건 순진한 우리 공상일 뿐이다. 우선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주문을 나는 알지 못했다. 대신 응달에 몇날 며칠 버틴 눈사람을 보며 숫자 '8'을 닮은 윤곽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곤 했다. 오른쪽 귀퉁이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8'자를 쓰는 나와 달리 왼쪽 귀퉁이에서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숫자 '8'을 쓰는 어머니는, 때로 숫자 뽄새가 밉다고 투덜대며 콧잔등에 올린 돋보기를 추켜세우며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 연습하기도 했다. 가끔 삶의 마디가 어긋날 때 당신이 내뱉던 '아이구, 내 팔자야.'하는 '팔자'가 '8'자를 미끈하게 쓰면 술술 풀린다고 여긴 건 아닐까.
중국인들의 숫자사랑은 유별나다. 오죽하면 베이징 하계올림픽 개막식을 2008년8월8일여덟시에 맞췄을까. '8'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다. 이는 중국어 발음으로 '8'을 'Ba(빠)'로 소리내는데, 재물을 얻게 된다는 뜻의 낱말 '파차이(發財)'의 앞글자 'Fa(파, 發)'의 '돈을 벌다'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8'이 여러 개 겹칠수록 더 큰 재물(富)을 부를 수 있다고 여기므로 손전화나 자동차 번호판 등에 되도록이면 많은 '8'이 들어있기를 바란다. 이에 비롯되어 '8888'이 들어간 자동차 번호판 가격이 우리 돈으로 이억 원에 거래되었을 정도이다.
'8'은 회복과 재생, 완성상태를 나타내는 수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철 큰스님의 장좌불와(長坐不臥) 팔년 수행은 한동안 도반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깃거리였다. 불교에서 팔정도는 깨달음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여덟 가지 수행 방법인 정견(正見),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 태극기에 사용되는 건(乾:☰, 하늘), 곤(坤:☷, 땅), 감(坎:☵, 물), 이(離:☲, 불)는 태(兌:☱, 못), 진(震:☳, 우레), 손(巽:☴, 바람), 간(艮:☶, 산)과 더불어 자연계의 기본요소인 여덟 가지 형상을 나타내는 팔괘로, 중국 상고시대의 복희씨(伏羲氏)가 만들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제8일째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인간이 새롭게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단식과 참회의 7일간이 끝난 8일째는 풍요와 신생의 날이다. 7+1이라는 의미에서 8은 옥타브를 나타내는 숫자로 재출발을 상징한다. 태양계의 행성은 총 여덟 개이다. 현대축구의 FIFA 월드컵 경기는 여덟 개 조로 구성된다. 체스 판은 8×8 크기이며, 각 진영마다 여덟 개의 폰이 있다. 여러 가지 일에 능통한 사람을 일컬어 '팔방미인(八方美人)'이라 한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난다'는 뜻의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도 다시는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강한 듯하다. 문어나 거미 다리는 여덟 개이다. 1992년 미국 경제 대공황에서 시작된 경제, 금융 위기는 당시 팔월 통화긴축 단행과 시월 증시 붕괴 등을 불러 일으켜, '팔월의 저주'라는 말로 널리 쓰인다.
지금은 여름이 절정인 팔월. 팔월은 활화산이다. 들끓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멈추어질 수 없는 시간이다. 마그마가 토해지듯 속에 재운 열정일랑 남김없이 쏟고 분출시켜야 한다. 빈 강정이 될 때까지. 계곡이나 바닷가에 다들 몰려가 팔팔하게 뛰는 이유가 그 때문이지 않은가.
Kevin Kern, Return To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