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모금에 떠올리는 아프리카의 '붉은 눈동자와 검은 땅'. 또 한 모금에 다큐로 접하던 '고통과 자본주의'를 생각했다. 남은 커피는 이완시키려는 '재인 시간과 각성의 부조리'를 위한 몫이다. 꿀꺽꿀꺽 커피를 들이키는 나를 보며 기어이 한마디한다.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왜 그렇게 마셔?'
영화나 드라마에 심취해 있다가 문득 짜증스러운 나를 발견한다. 왜 물 흐르듯 이어지지 못할까.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등장인물을 갖다 놓아 걸핏하면 목소리를 높여 파행을 일으키는 게 거슬린다.
우리 아이가 콩알 만할 적에 들르는 인척집이 있었다. 가서 웬간히 머무르기 일쑤였는데, 무척 친절한 아저씨가 부산한 아이에게만은 고운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애가 온다는 전갈에 장식품이나 수집품 들을 장롱 위나 책꽂이 상단으로 깡그리 치워 두었다고 했다. 그것도 모르고 아이는 올려져 있는 것들을 내려달라고 떼를 썼다. 일면 섭섭키도 하다.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물건이지만 그게 우리 꼬마에 비길까!'
헌데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부분도 아니다.
탈것을 만들 수 있는 미니레고 세트를 사 온다. 보트나 증기기관차, 기중기나 덤프트럭, 비행기, 불자동차 등 아이가 좋아하는 레퍼토리들만으로. 헌데 꾸며 놓으면 이 녀석이 금방 이로 물어뜯거나 낱낱이 해체하여 부속을 망가뜨려 허탈하다. 나중에라도 갖고 놀던 장난감을 보관해 둘 참이었다. 어른이 된 다음 해질녘 다락에서 어릴 적 추억을 꺼내들면 얼마나 즐거울까를 생각하면서. 그게 여의치 않다. 가만히 생각하면 아이를 위해 장난감을 조립하는지, 아니면 내 불안정한 심적만족을 위해 미니레고를 만지작거리는지 분간할 수 없다.
나이가 들면, 생각을 굴리기보다 몸을 먼저 움직여야지하고 작정했는데 쉽지 않다. 나를 가로막는 습관과 살아온 행태. 지나치게 복잡한 규칙이나 법률에 얽매인 내가 보인다. 노자(老子)가 유가(儒家)를 비판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간단명료해지기를 바라면서도 말부터 늘어놓고, 이왕이면 말을 잘하려다 보니 말이 많아진다. 말이 말을 물고 늘어진다. 주변에 나도는 메뉴얼은 하나같이 복잡하다. 여기서, 위반사례를 모을수록 더 많은 예외가 나와 혼란을 가중시킨다. 동일한 법도 해석은 제각각이다. 너도 나도 '법대로 하자'며 송사를 일삼아 재판관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심한다.
두 번이나 더 커피를 리필 받아 뚝딱하는 순간 앞에 앉은 친구는 삼분의 일도 채 마시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을 이어 간다. 커피의 유해점에 대해서. 마시는 습관에 대해서. 커피에 얽힌 일화까지 주섬주섬 나오는데 일어섰다. 온국민의 관심사이던 태풍 볼라벤의 영향으로 뿌리는 비에 진한 커피 향이 그립더라니,
목표를 향해 쫓아가는 과정을 중요시했다. 결과물이야 어떻든 내몫으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도중에 틀어지고 길이 바뀌어 더러 어긋나도 꿋꿋이 참았다. 그걸 내속은 녹이기 힘들었나 보다. 딴지를 걸고 구구한 억측으로 주변을 힘들게 만드는 이가 왜 그렇게 많을까,
더 이상 각성에 대해 생각지 말아야지.
Nam. T.S., River In The Pi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