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 이 즈음에 어울리는 낱말을 떠올렸다. 이슬과 햇살, 친구, 미소, 국화와 향기, 오후, 하늘 등 그리고 한길에서 맞닥뜨린, 누군가를 기다리며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여인까지. 형상화를 위하여 낱말마다 형용사 하나씩을 붙여 본다. 옴팡진 이슬, 노릇한 햇살, 오래된 친구, 상큼한 미소, 짙은 국화향, 기름진 향기, 나른한 오후, 노을찬 하늘, 인어공주 닮은 순정한 여인 등. 비로소 가을이 지난 여름의 막막한 기억을 조금씩 밀어내는 듯하다.
맨살을 드러내기 싫은 나는, 간편복장을 선호하지만 한여름에도 껴입는 때가 많다. 당연히 진중한 얇은 옷이어야겠지만. 이중삼중 겹쳐 입는 걸 식구들이 말리기도 한다. 그럴 땐 외려 내가 버럭한다.
"대체 옷차림이 왜 그러냐?"
일명 '똥싼바지'라는 유행에 편승하여 골반에 겨우 걸치거나 앉으면 엉덩이가 반쯤 드러나는 바지, 혹은 타이즈처럼 달라붙어 하체가 불안정해 보이는 바지를 입은 아이가 찔끔한다.
"그렇게 일러도 고수하는 건 반항이잖아?"
참 못마땅하다. 더우면 한겹 벗으면 되는거지. 나나 아이나 고집은 고집대로이고 재삼재사 똑같은 잔소리가 되풀이되는 것도 누군가 알면 웃을 일이다. 예전 어른들은 당연히 의관을 정제한 내게 가상한 눈치를 보냈다.
불가사의한 숫자 3의 거듭제곱으로 만들어지는 9는 십진법에서 한 자리 숫자의 맨 마지막 숫자이며 가장 큰 수이다. 숫자 10이 완성의 숫자라면, 9는 완성에 가까운 성숙의 숫자이다. 9의 배수인 18, 27, 36, 45..... 등의 낱수를 각기 더하면 도로 9가 되어 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둑에서 바둑을 가장 잘두는 사람을 9단으로 부른다. 이에 빗대어 정치를 잘하는 정치꾼을 정치9단, 비위 잘맞추는 아첨꾼을 눈치9단으로 칭하기도 한다. 야구에서 9번타자는 상위타선인 1번타자로 이어지는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할 만한 선수에게 맡긴다. 골프는 9홀씩 2회 18홀을 돌며 경기한다. 일본에서는 아홉 '구(九)'와 괴로울 '고(苦)'의 음이 모두 '구'(일본어く)여서 9를 기피하는 '9공포증'이 있다. 이와 달리 중국이나 중화권에서는 9의 발음인 '지우(Jiu)'가 '길다, 장수하다' 등의 뜻을 가진 '구(久)'와 같아 9를 '황제의 숫자'로 여긴다. 우리나라에는 흔히 19세, 29세, 39세 등 아홉이 든 나이를 아홉수라 하며, 이때 액운이 끼니 조심하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나이에 아홉이 든 때는 결혼이나 이사 등을 금하는 경향이 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10년 주기로 변화와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보자. 좋은 일 가운데 나쁜 일도 생길 수 있어 몸과 마음을 조심하라는 데서 아홉수가 나온 건 아닐까.
숫자 9는 '크다, 많다, 어렵다'라는 의미를 은연중 내포하지만 1이 채워지지 않으면 모자라는 결핍의 수로 여겨지기도 한다. 구척장신(九尺長身)이나 구우일모(九牛一毛), 구사일생(九死一生) 등의 사자성어에도 쓰이지만 우리 전설에 나오는 꼬리가 아홉 개인 구미호는 천년에서 하루가 모자라는 바람에 사람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예전에 즐겨보던 만화, 마쓰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의 큰 테마는 '소년의 성장'이었다. 여기서 '999'라는 수의 의미는 이 다음에 오는 수 1000(千)이 '어른'이 된다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
봄날 씨 뿌린 자리에서 자라다가 조락한 채소를 걷어냈다. 어슬렁대던 시간이 점점 빨라지며 이제 막 아홉 굽이를 넘어가는 참이다. 잡풀이 무성한 밭둑을 거닐다가 풀 더미 사이 우뚝한 부추꽃을 발견했다. 신기하게도 바깥돌이 꽃이 아홉 송이이다. 어떤 뜻이 있는 것만 같아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Yanni, The Mermaid
'不平則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낮은 곳에서 (0) | 2012.09.27 |
---|---|
태풍이 아니온 적 없다 (0) | 2012.09.18 |
산이 푸르다고? (0) | 2012.09.10 |
어느 생의 한나절 (0) | 2012.09.04 |
오늘은 에스프레소로 (0) | 2012.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