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름시름 앓은 계절. 가을은 절정 무렵 스스로의 숨통을 미련없이 끊어버린다.
가로수 아래 섰다. 메마르고 갈라터진 수피를 어루만지며. 마주보는 가게에서 쫓아 나온 불빛이 발 아래를 보듬는다. 지난한 시간이 따뜻한 기억으로 물씬물씬 묻어난다. 구비마다 겉잡을 수 없는 격랑으로 흘렀던 세월. 돌아온 탕아처럼 눈물겨워 치기어린 시절의 악동처럼 콧등을 훔치기도 했다. 사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자동차 시동을 켜두었더니 붕붕거리는 소리가 어스름 내린 저녁을 밀어내는 듯했지. 가게 유리문을 밀며 점원 아가씨가 삐죽 고개를 내민다. 한움큼의 불빛이 뿌려진다. 안쪽에서 바쁘게 오가던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어. 뽀얀 불빛에 해맑은 피부가 드러난다. 긴 머리와 다보록이 내린 미디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차림으로 눈길을 주는데, 깊은 속눈썹 안 맑은 눈동자에 가슴이 두근거리잖아. 선한 눈초리가 낯익어 미소 지을 뻔했어. 아아, 순이가 너처럼 환했을 거야. 그렇찮아도 조각배처럼 흔들리다가 울컥했어. 별안간 순이가 고개를 돌린다. 나이든 아주머니가 나타나 입을 벙긋벙긋해. 목줄에 끌리듯 순이가 들어가 버리고, 대신 아주머니가 나를 힐끗 보았지. 슬리퍼를 끌고 나온 아주머니가 매정하게 가게 블라인드를 내려 버렸어.
와글거리던 가을이 끝났지. 바람에 떠다니던 나뭇잎이 구석진 곳으로 숨어든다. 순식간에 겨울이 들이찬 듯 한기가 돋아 자라처럼 목을 움츠려야 했어.
Eric Clapton, Autumn Lea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