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고 쫓기는 박진감 넘치는 액션영화에서 주인공이 신용카드를 모두 버리거나 사용하지 않는 건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영화의 등장인물도 아니면서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인터넷뱅킹조차 하지 않는 회사 동료. 계산이 빨라 이곳저곳 모임의 직책도 맡고 있다. 그러다보니 입출금 내역도 일일이 은행마다 다니며 통장을 찍어서야 확인하는 아날로그형이다. 그 친구가 드디어 작년 말 공인인증서를 만들었다. 이유인즉, 연말정산간소화 서비스를 이용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다. 홀로 시대에 맞서 그게 자존심이라 외치며 버티기란 어렵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액티브엑스 기반의 공인인증 체계는 최근 해킹이나 개인정보 유출 등 범죄의 표적이 되면서 말이 많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어느 날 퇴근 후 현관문이 열리지 않아 애먹었다는 하소연을 한다. 덜컥거리며 씨름하는 중에 집 안에서 자던 아이가 소동을 알아채고 문을 열어 주어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면서, 오래 사용한 현관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고는 미처 이를 알려주지 않은 식구들을 탓한다. 옆에서 듣던 다른 친구가 이죽거린다.
'임마, 그건 이제 너 보고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야. 조심해!'
피싱이나 파밍 등이 판을 친다. 보안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뜨는, 비밀번호를 바꾸라는 팝업창을 따라 멋모르고 교체했다가는 범죄단체에 곳간키를 그대로 맡기는 형국이 되기도 한다.
나도 한동안 사용하는 이메일 로그인을 못해 애먹은 적이 있다. 무심코 비밀번호를 바꾸었는데, 그게 원하는 문자 자판이 아닌 다른 문자가 눌러져 등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포털사이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문의하고, 아는 이에게 전화를 걸어 그 사이트에 로그인이 되는지 확인하는 법석을 떨었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니 초조해져 환장할 지경이었다. 나중 어떻게 비밀번호를 찾아내기야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사이트에는 예전 등록한 비밀번호를 기억해내지 못해 아예 접근조차 못하는 데가 몇 군데 있다. 버젓이 내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어도 열지 못하는 현실이 우습기만 하다. 어느 할머니는 통장 안쪽에 비밀번호를 적어 놓고, 통장 도장까지 함께 두어 누군가 돈을 찾는 빌미가 되었다던데. 그렇게까지 여기저기 비밀번호를 노골적으로 써놓을 수도 없다. 오늘도 쫓아들어가야 하는 수많은 방들. 이미 등록된 비밀번호를 바꾸라는 독촉이 이곳저곳 들어갈 때마다 떠서는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Dana Dragomir, Chiquiti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