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시작해 질긴 냉면가락처럼 하염없는 비. 수량이 늘어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계곡 물길. 이를 거슬러 오르는 산길에서 문득 철학자처럼 갸웃거립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삶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꾸덕꾸덕한 날씨 탓일까요. 답 없이 맴돌기만 하는 생각을 떨치듯 걸음을 재촉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건 선물처럼 주어진 '오늘'을 맞았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오늘은 오늘일 뿐, 특별한 오늘이 날마다 되풀이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꽃이 피고지듯 시간이 영속적일 수는 없습니다. 콸콸 소리내어 흐르는 저 물줄기도 비 그치면 잦아들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을 소진한 다음의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억만 광년이나 떨어진 다른 별에 휘익 날아가서는 지금 기억을 깡그리 잊고 또 다른 생을 영위하는 건 아닌지. 생각에 가지가 벋어 별별 생각을 잇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별을 날아다니는 여행자라니. 어느 저녁답에는 보랏빛 석양을 머리에 얹고서 제각기 겪은 생을 토로할 일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당신과 나의 묵묵한 지켜보기도, 격한 사랑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도, 애절한 시간도 오래된 책을 펼쳐들듯 꺼내 자근자근 얘기할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지난 봄 미끈한 등걸만으로 버티던 팥배나무에 기댑니다. 생기란 경이롭습니다. 푸르른 잎을 이렇듯 폭죽같이 터뜨릴 줄이야. 잎맥이 분명한 이파리가 하늘을 가립니다. 건너편 육중한 직벽 곳곳에 금이 가 있습니다. 뿌리 내리고 천착한 품 안 소나무들 때문이겠지요. 적요의 산중에서 노랑할미새 한 마리가 길을 인도하듯 앞장서 날아갑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이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산문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물길이 시작되는 아슴한 데까지 눈을 돌리자 무성한 신록이 뭉쳐 있습니다. 불현듯 숲이 온갖 형상으로 비칩니다. 형태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지나치는 것과 앞으로 거쳐가야 할 것, 분명한 것과 흐릿한 것, 가진 것과 나눈 것, 함께하지 못한 것 들을 뭉뚱그려 알려주는 생의 비밀을 간직한 샘이 어딘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아 두리번거립니다.
복중 더위가 맹위를 떨칩니다. 이 장편은 아직도 모호한 채 제가 어떤 의미를 새기기 위해 보내는 편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Thomas Otten, Ombra Mai F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