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볕이 내린다. 누워 딩굴며 마른 풀의 까칠한 감촉을 즐기거나 낯을 간지럽히는 노란 햇살을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 진작 서둘러 삭정이로나마 망태를 채웠다. 마침 산등성이에 상태가 보인다. 저만큼 아랫마을 재중이도 나타나고. 솟아나듯 삼수와 경만이 등 아이들이 모여들어 너나들이를 하다가는 씨름판이 벌어졌다. 상태야 힘이 장사다. 자랄수록 벌어지는 어깨와 건장한 가슴팍을 보면 위압감이 일 정도이다. 이에 만만찮은 재중이가 도전하여 때 아니게 우리 마을과 아랫마을 간의 명예가 걸린, 질 수 없는 한판 승부가 되어 버렸다. 솔숲 너머에서 머리 위 두 자나 넘게 나뭇단을 쌓아 건들거리며 오던 형권이가 위태하게 지게를 받히고, 심판을 본다. 손에 땀을 쥔다. 다들 자기가 맞붙은듯 지레 헛심을 쓰며 둔덕 씨름꾼들을 주시했다. 상태야 우직하게 버티는 축이고, 재중이가 상태 주변을 돌며 틈을 엿본다. 그 눈이 허공을 맴도는 솔개를 닮았다. 먹이를 채듯 잽싸게 움직여 보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콧김을 뿜으며 씩씩거리고 붙었다가는 떨어지는 지루한 탐색전이 이어진다. 이래서야 승부가 날까.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게 없는 격이다. 우연히 두리번거리던 영수가 힐끔거리다가는 김을 뺀다. 소가 보이지 않는다고. 걔가 팔랑귀에다가 말을 가볍게 해 다들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재중이 손이 억지로 파고들며 상태의 안다리를 감아쥐었다. 굵은 재중이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기우뚱하는 상태를 보며 다들 신음을 냈다. 간신히 버틴 상태가 허리를 뒤로 빼며 안으로 파고 든 재중이를 잡아 번쩍 들었다. 환호성이 인다. 나도 벌떡 일어났다. 어느 순간 약속이나 한듯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다. 아까도 어슬렁거리던 우둔한 그림자를 보았는데 왠일일까. 안산 둔덕 양지바른 자리에 우뚝한 윤노리나무에 매둔 소가 없어지다니. 눈을 끔벅이기도 하면서 서로를 쳐다본다. 설마해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눔 소가 잘 맥여주고 재워주는 나를 두고 어디 가뿟노!'
흩어져 뒤져도 요즘 유난히 잔등에 윤기가 흘러 할머니가 볼 때마다 감탄하는 암소를 찾을 수 없다. 혹시 집으로 가는 길을 떠올리고 혼자 되돌아 간 건 아닌가 싶어 헐레벌떡 쫓아갔지만 휑뎅그렁한 외양간을 보자 서럽기만 하다. 차츰 날은 어두워 오고, 뿔뿔이 들로 나간 식구들이 돌아올 때쯤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게 어떤 소인가. 아침 나절 우쭐거리며 끌고 나올 때 한눈 팔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한 할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가을이 익을수록 숙성하여 찰랑이는 햇살. 오늘 저녁 무렵은, 상처로 기억되는 그날 저녁처럼 핏빛으로 천지가 붉게 타오르다가 사그라져 버렸다.
Giovanni Marradi, Nabu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