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열매가 맺혔으니

*garden 2013. 12. 3. 10:17




전화기에 귀를 대고 숨죽인다. 간단없이 이어지는 전화 연결음. 부조로 남은 맞은편 벽 담쟁이 무늬를 눈으로 그렸다. 의미 없이 세다가는 일곱, 여덞 번째인가, 통화종료를 눌렀다.
'전화를 안받는다니.'
파발마처럼 쫓아간 신호음이 사그라드는 허공에 들이차는 찬 기운이 느껴진다. 그나저나 손에서 전화기를 떼놓는 적 없는 녀석이 왠일이지? 궁금하지만 다시 할 수도 없고. 그 참에 내 전화기가 울렸다. 그러면 그렇지. 전화기를 열자 마자 들리는 생경한 목소리. 거두절미하고 '거기가 어디냐?'고 묻는 상대.
'왜 그러십니까?'
'아,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어서요.'
'그럴 리가요. 아마 잘 못 연결되었나 봅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린다. 황당하여 상대를 노려보듯 전화기를 내려다 보았다. 방금 엉뚱한 곳에 전화한 건가. 우리 아이 전화번호가 틀림없는데.

통화가 바로 되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이가 많다. 사무실 이대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핸드백 안에 둔 전화기가 울렸다. 다른 이가 대신 받을 수도 없는데 이삼분여 벨 소리가 줄기차다. 두어 해 전 배가 부른 채 결혼식을 올릴 때와 달리 사랑으로 이해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전화를 받지 않을 때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고 여기지 못하는 걸까. 그게 한두 번이 아니다. 연결되지 않으면 상대가 받을 때까지 전화기를 들고 있는 집요함이 섬뜩하다. 늘 질린 듯 앉아 있는 이대리 얼굴을 새삼 쳐다보았다.

나중 아이는 전화 번호를 교체하였다고 했다.
'너 얼마 전에 번호를 바꾸었잖아.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기에 그렇게 수시로 바꾸냐?'
예전에는 식구나 주변 사람들, 자주 거는 전화 번호를 거의 외고 있었는데 요즘은 어림없다. 헌데 이 녀석 전화 번호는 얼핏 봐도 낯설다. 식구와 유사 번호로 움직이다가는 그게 어느 때부터 아주 딴판인 숫자 조합이 되어 버렸으니. 아예 독립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인가 싶어 안도하다가도 노파심을 떨칠 수 없다.
알고 보니, 쓸데 없는 전화가 많아 바꿨다고 한다. 오랜 동안 휴면중인 번호라고 했는데, 개통되자 전 주인과 연관된 전화가 하루에 스무 통 이상이다. 전화기 안에서 들리는 사투리도 익숙치 않고, 금융관계 독촉전화와 카톡으로 연결된 난잡한 이야기. 끊이지 않는 대출권유와 술집에 다녔는지 낯선 아가씨들과 이어지는 전화들. 오죽하면 스팸문자로 배터리가 닳을 정도였다고.
알게 모르게 떠안아야 하는 세상이 모두 이럴까. 꽃지고 잎마저 떨어졌다고 끝난 일은 아니다. 이제 나도 갖고 있던 손전화 번호를 바꾸어야 한다. 그게 언짢다. 다들 그렇게 바꾸는데 왜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일이든 넙죽넙죽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팔만사천년 후라도 문득 떠오르는 네가 전화 한번 때려주기를 바랐는데, 강제번호이동으로 다른 번호를 사용해야 하는 마당이니 생각이 많다.












Sergei Trofanov, Yumeji's Theme(화양연화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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